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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나이

2025. 5. 26

by 지홀

배우의 실제 나이와 극 중 나이는 다르다. 스무 살 넘은 배우들이 고등학생 연기를 종종 하는데 청소년으로 보인다. 사십 대 배우가 회상씬 등에서 청소년 역할로 등장할 때가 있는데 다소 나이가 들어 보여도 시청자는 이해한다. 다만 회상씬처럼 잠깐 나오는 장면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외모가 극 중 나이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시청자는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 삼십 대가 오십 대나 육십 대 연기를 하기도 하는데 분장하면 그럴듯하게 보인다. 거기에 자세, 걸음걸이, 목소리 등으로 등장인물에 빙의하면 우리는 깜빡 속는다. 그러나 이 역시 비교적 노출 횟수가 적거나 특별한 설정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굳이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사람 역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제 나이에 맞는 배우가 역할을 맡을 것이다.


"헤다 가블러(Hedda Gabler)"라는 연극이 공연 중이다.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이혜영 배우의 연극과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이영애 배우의 연극이 동시에 무대에 올랐다. 두 배우를 비롯한 각기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비교해 보는 즐거움이 있을 것 같다. 나는 이혜영의 헤다 가블러를 봤다. 막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헤다 역할을 한 이혜영은 거의 삼십 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었는데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맨 앞줄에서 봤는데도 얼굴에 주름이 보이지 않았다. 이십대로 추정되는 헤다의 외모로 이해되었다. 목소리는 다른 연극 무대(갈매기)나 TV에서 보던 것과 달리 힘을 뺀 소리였다. 젊고 여성스러운 목소리. 이혜영이란 배우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여서 놀랐다. 예쁘고 아름답고 젊지만 여자 혼자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대적 배경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 따분한 일상을 사는 여자, 게다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고 미래가 불투명해 불만이 내재되어 있는 여자, 그렇다고 사랑에 목숨을 걸지도 않는 여자를 참 잘 표현했다. 목소리와 몸짓으로 관객을 설득했다. 다른 배우들과 족히 15~20년은 차이 날 것 같은데, 극 중에서는 서로 다 동년배로 보였다. 편견 때문에 연극하는 이영애보다 이혜영의 연기가 단연 압도적이고 볼만할 거라고 여겼는데, 헤다의 캐릭터가 저렇다면 이영애도 잘 소화했을 것 같다. (문득 두 배우 모두 헤다의 나이보다 많은데, 이십 대 여배우가 연기하는 헤다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인터미션까지 3시간가량 이어진 공연인데 중간에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졸지 않았다. 모든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 눈을 떼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그중 압권은 이혜영이었지만. 특히 중간에 자장가를 부르는 장면은 의외였고 멋졌다.


실제 나이를 초월하여 극 중 인물의 나이로 살아볼 수 있는 것 또한 연극의 매력 같다. TV드라마나 영화는 아무래도 시청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외모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연극은 외모보다는 연기력, 관객을 얼마나 잘 설득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 같다.


수채화같은 구름과 하늘(08:57, 12:55,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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