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11
"제가 이렇게 속내를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어 좋아요. 제 말을 곡해하거나 오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니까. 우리가 오래 봤잖아요"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울 것까지는 아닌 말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만큼 눈물이 흘렀는데 후배가 "호르몬이 문제예요"라며 기분을 환기시킨다.
거의 20년을 한 회사에서 일했다고 모두 친한 건 아니다. 한 팀에서 함께 일했다고 친한 것도 아니다. 서로 어떤 관계를 쌓아왔는지가 중요하다. 한 때는 친하다고 여겼지만, 다른 팀이 되며 점심 한 번 먹지 않는 사이가 되기도 하고 내내 다른 팀에서 일했지만 사적으로 가까워지는 사람도 있다. 그 관계 저변에는 신뢰가 깔려있어야 한다. 회사에서 어떤 소문이 돌아도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든든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친하다면서 어떤 사안에 대해 '그 사람'을 의심하고 남이 하는 말에 동조한다면,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를 홀대하나 싶어 서운하고 괘씸했던 마음을 한 꺼풀 벗겨보니 나도 그녀를 그렇게 대했다. 한때는 친했고 속내를 말한 적도 있지만, 다른 팀을 이끌며 경쟁심이 아주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에는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그녀가 하는 일에는 그만큼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나는 소위 '반사'하지 않고 일을 다 떠맡는데 그녀는 요리조리 설명하고 설득하여 일을 피한다고 여겼다. 직원들을 줄 서게 만드는 리더의 성향에 맞춰 줄을 잘 선다고 치부했다. 그렇게 간극이 벌어졌다. 선임팀장에서 내려가는 입장이 된 나와 선임팀장으로 올라가는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점점 높아졌다. 그건 그녀가 만든 것도 있을 테고 내가 만든 것도 있을 터인데, 내 탓보다 남 탓을 했다. 내 처지가 바뀌니 사람이 바뀌었다고. 마치 연예인이 스타가 되면 사람이 변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말을 하듯. 스타가 된 사람의 본질은 사실 바뀌지 않았지만 주어진 역할이 달라지고 해야 할 일이 많아 예전 같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했을 뿐일 텐데. 스타가 되지 못한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일 텐데. 물론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누리는 것들이 달라지는데 태도가 한결같은 것도 비인간적이다. 겸손하되 굽신거릴 필요가 없어졌을 수 있다. 스타를 떠받드는 문화와 분위기 속에서 조금 우쭐해지는 건 너무도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싶었다면 내가 더 믿음을 보여줬어야 한다. 그녀를 둘러싼 여러 얘기들을 잘 청취하고 "그녀는 그렇지 않아"라고 방어도 해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내 위주로 재단하고 평가한 후 평판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얘기를 했으며, 남의 험담에 동조도 했다. 그런 에피소드들을 그녀라고 못 들었을까. 결국 서운해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어긋난 건 어쩔 수 없다. 어긋난 걸 다시 맞추는 일은 어렵고 그럴 시간도 충분하지 않다. 그저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같이 일한 사람으로 기억될 밖에. 어떤 사람과는 그렇게 스치는 인연인 것이고, 어떤 사람과는 굳건한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우정을 나누며 오래도록 지속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몇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동료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괜찮은 직장생활을 한 셈이니 더 욕심부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