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12
순조롭다의 사전적 의미가 일 따위가 아무 탈이나 말썽 없이 예정대로 잘 되어 가는 상태라고 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이 잘 풀릴 때 ‘순리’대로 되었다고 하는데 순조로운 것이 순리라고 나온다.
동생이 집을 구한다. 여러 곳을 많이 다니다가 마음에 딱 맞는 곳을 발견했다고 하여 같이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분이 그 집이 마음에 든다고 바로 계약을 하겠다고 했단다. 부동산 중개인은 “보통 두 번 정도 보고 나서 결정하는데, 처음 보자마자 계약하겠다”라고 했다며 난감해했다. 집을 보여줄 수 없겠다고 했다. 동생은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한 번 더 볼 수 없겠냐고 물었다. 중개인은 잠시 기다리라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주인은 흔쾌히 둘러보라고 허락했다. 계약할 사람도 아닌데 집을 구경시켜 줘 고마웠다. 우리 앞서 집을 둘러본 분이 거실에 앉아있었다. 동생과 나는 집을 둘러본 후 나오며 무척 아쉬웠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혹시 저분이 가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면 알려주세요”라고 하며 뒤돌아섰다. 마음에 든 집을 놓쳐서 아쉬웠지만, 낙담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사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동생과 둘이 그 동네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혹시 볼만한 집이 있는지 몇 곳에 들러 물어봤는데 우리가 원하는 조건의 매물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한 부동산에서 자기들은 아파트 위주로 거래하므로 빌라를 주로 하는 부동산에 가보라며 이름을 알려줬다. 이름을 따라 들어간 부동산은 부부가 운영하시는 부동산이었다. 여사장님이 우리가 봤던 그 빌라의 다른 집이 있다며 집주인에게 확인하더니 내일 오후에 볼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날 동생, 엄마까지 총출동하여 집을 봤다. 그 전날 봤던 집의 아래층이었다. 집이 아주 깨끗했다, 작은 집에 알맞게 가구를 배치하여 깔끔했다. 동생은 꼼꼼히 돌아보더니 마음에 든다고 했다. 집을 보고 나오며 좀 깎아주면 오늘 계약하겠다고 했다. 부동산 사장님은 이 물건이 다른 부동산 물건이라 얘기를 나눠봐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하루 더 생각해보고 하자고 하시는데, 동생과 나는 어제처럼 눈앞에서 놓칠까 봐 조금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 우리가 제시한 가격 그대로 깎아주었다. 옥신각신하며 가격 협상하지 않았다. 이사 날짜도 촉박했는데 맞춰준다고 했다. 너무나 순조롭게 일이 술술 풀렸다.
그날 저녁에 어제 집을 소개한 부동산에서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고 한다. 가 계약했던 사람이 파기하겠다고 했다면서. 간발의 차이로 놓친 것이 기회가 되어 하루 사이에 더 마음에 드는 집을, 더 싼 가격에 샀다. 어찌 보면 가 계약한 그분이 우리의 은인일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다. 혹은 운명이 어떤 면에서 얄궂은 것일지도. 우리 앞서 계약한 그분은 어쩌면 우리 때문에 서둘러 계약했을지도 모른다. 동 시간에 집 보러 간 사람이 있으니 초조했을 수 있다. 반면, 우리는 그분 때문에 더 좋은 조건의 집을 구했다. 마치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은 그 전임 대통령이 발탁해서 국민에게 이름을 알렸기에 대통령이 되었고, 지금 대통령이 된 사람은 계엄령 때문인 것처럼. 서로 다른 당에 정권을 넘겨주는 계기를 만들어줬는데 정작 그들은 서로를 은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