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23
머릿속이 복잡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해결해야 할 과제를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회사 다이어리에 일자별로 할 일을 적어 놓고 일을 처리하는 편이다. 적어 놓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다이어리는 나의 필수품이다. 점심이나 저녁 약속을 잡아야 할 때도 다이어리나 휴대폰 달력을 봐야 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기억만으로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 다이어리에는 회사 일만 적고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은 기억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도 다이어리에 적기 시작했다. 일테면 올리브영에서 화장품을 사야 하는 일처럼 극히 사적이고 소소한 일도 적었다. 그렇지 않으면 화장품 사야 한다는 생각을 매번 아침에 화장할 때마다 했다. 아침에 기억했다가 하루 종일 잊고 다음날 또 기억해 내고. 회사 냉장고에 넣어 둔 두유나 과일 등을 먹어야 한다는 내용도 적었다. 아니면 냉장고에 넣어 놓은 사실을 잊고 안 먹기 일쑤였다.
뭐든 기록하고, 기록한 것을 본 후에 움직이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적지 않으면 도무지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최근 2~3개월은 할 일을 적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처리했다. 무엇보다 업무를 맡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다 보니, 순서를 정하지 않게 된 거다. 오늘의 할 일과 내일 할 일을 구분해야 하는데 그냥 떠오르는 대로 했다. 보고서를 쓰다가 적당한 단어를 찾겠다고 검색하는 와중 뉴스가 눈에 들어오면 뉴스를 한참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자로 말 거는 사람과 대화하다가 정작 할 일을 못하기도 했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다음 날 혹은 그다음 날에 하겠다고 미루었어야 하는데, 무슨 배짱으로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괜히 마음이 바쁘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왜 이리 정신없나 했더니 그 이유를 이제 알았다. 회사 일처럼 내게 벌어지는 이 모든 일을 순서를 정해 차근차근 해결하면 되는데 동시에 한꺼번에 다 하려고 해서 문제였던 거다. 다이어리를 펼치고 할 일을 나열한 후 우선순위를 정했다. 하다못해 새로 산 노트북의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시기와 구형 노트북을 초기화하는 시기도 정했다. 둘 다 은근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엄마 운동화를 검색할 때, 친구에게 커피쿠폰을 보내야 할 때, 여행 캐리어를 알아보고 주문하는 것, 다 쓴 클렌저를 구매할 때, 브런치 글을 써야 할 때, 여행자 보험과 데이터 e-sim을 구매할 때, 면세점에서 물건 살 때 등등을. 일상에서 루틴 하게 하는 일 외에 해야 할 일이 정말 너무 많다. 그걸 생각나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하려니 중구난방이었던 거다.
차분하게 다이어리에 날짜별로 적었다. 언제 처리할지. 그랬더니 머릿속이 정리되고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할 일을 하겠다고 계획한 때에 하면 되니까 여유도 생겼다. 적고 보니 급하게 서두를 일은 하나도 없는데 백만 가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초조하고 조급해져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유달리 5월부터 나를 바쁘게 만든 일이 많았는데 진작에 우선순위를 정해 대응했어야 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 내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잘 통제하고 관리하길 바라는 인간이란 걸 알았다.
'I've got everything under control'
피곤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