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25
6월부터 격주로 철학수업을 듣는다. 책 쓰기 워크숍 모임에서 주관하는 수업으로 격주 수업이다. 줌으로 듣기 때문에 장소 제약을 받지 않아 편리하다. 온라인 수업의 장점이 장소 구애를 받지 않는 반면, 오롯이 수업에 집중하기보다 다른 일을 병행하며 듣게 되는 단점이 있다. 물론 수업에 집중해야 하지만, 톡이 오거나 처리할 일을 수업 전에 끝내지 못했거나 하는 등의 변수가 생긴다. 그래서 첫 수업 때는 두 시간 수업 중 한 시간은 거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래도 뇌리에 남은 건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 들었는데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가진 심오한 의미에 대해. 그가 정치인의 계략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은 작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안타까웠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의 핵심 철학은 "이데아'라는 것. 이상주의자였지만 그가 가진 사상이 21세기에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남성우월주의 의식.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가진 생각의 한계였을 수 있겠지만, 그런 생각이 거의 모든 인류사에 수 천년 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의 삶은 참 고단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오늘은 두 번째 철학수업으로 정말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한 데카르트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 사상의 배경을 듣자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등으로 나눈 그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역시 의문을 갖게 되는 지점도 있다. 육체는 기계와 같다는 사상에 근거해 사람의 고장 난 곳을 이식하는 의료기술이 발전했다고 하는데, 기계의 부품을 갈듯이 장기를 바꾸는 의료기술은 분명 생명연장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이의를 달고 싶지는 않다. 다만 육체를 기계처럼 본다는 시각이 불편할 뿐. '사유'하는 것은 정신이므로 육체가 필요 없다는 인식이지만 이 부분은 정말 갑론을박 토론의 여지가 너무도 많은 부분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으로 시작한 수업은 인공지능이 '사유'하는 존재일까, '사유할 수 있는 존재'일까라는 의문으로 확장되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공지능'에 외피를 입히려고 노력 중이다. 로봇에 인공지능 정신을 장착하여 물리적 움직임을 꾀한다. 사람은 그 로봇을 사람처럼 대하려고 한다. 교수님 말씀이 사람은 의인화를 잘하는 존재라며 반려동물,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사람인양 대하는 모습이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수업을 같이 듣는 분 중 한 분이 챗지피티에게 이름을 붙였다고 하여 다들 웃었다.
인간의 기본 정서가 서로 마음을 나누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 같다. 위로하고 위로받고 손을 맞잡고 안아주고 격려하고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존재. 혼자 기뻐하는 건 하나도 즐겁지 않으며 혼자 슬퍼하면 깊은 늪속으로 더 빠져든다.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이라도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립감은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가 챗지피티에게 정보를 묻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심리상담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마음을 나누고픈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인공지능이 로봇의 육체를 갖고, 그 로봇의 외양이 점점 더 인간을 닮아갈수록 사람은 그 로봇에게 더 마음을 주게 될 것이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흔히 보았듯. 그런 세상이 곧 다가온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인 듯 현실이 되어가다니, 그런 세상에 내가 살게 되다니 정말 비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