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날

2025. 7. 10

by 지홀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밖을 못 나갈 정도는 아니라 우산을 들고 예약한 시간에 맞춰 미용실로 갔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미용사는 모두 한국인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일본인 미용사가 담당한다. 카운터에 넌지시 한국인만 계시는 줄 알았다고 했더니, "한국인으로 바꿔드릴까요?"라고 묻는다. 그러나 내 성격 상 그렇게 해달라 요청하지 못하고, 그냥 하겠다고 대답한다. 카운터의 직원은 (사장님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저분도 잘하는 분이에요"라고 해서 믿기로 한다.


조카가 원하는 헤어스타일 사진을 보여주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어느 정도의 길이를 원하는지 묻는데 나는 더 짧게, 조카는 더 길게 요청했다. 나는 허리까지 오는 조카의 긴 머리를 싹둑 단발로 하고 싶지만, 조카는 긴 머리를 고수하여 가슴 위로 유지하고 싶어 했다. 결국 둘이 합의 본 건 쇄골까지 오는 길이였는데 미용사가 사진 속 길이를 감안하여 이 정도면 되겠냐고 물어본 거다. 나는 좀 더 위로 조카는 좀 더 아래로 얘기했는데 2~3cm 차이가 나는 두 여자의 발언에 미용사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다가 미용사는 조카 얘기를 듣기로 결정한다. 현명한 선택이다. 당사자 마음에 들게 잘라야 한다.


일본인 미용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머리카락 구획을 나눈다. 뒷머리, 옆머리, 앞머리. 가위를 자르는 손이 무지 조심스럽다. 한눈에 봐도 초보자임이 보인다. 능숙한 사람이라면 가위질에 거침이 없는데. 옆머리 레이어드를 넣는 과정, 앞머리를 자르는 과정에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구분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뉴질랜드는 미용실 요금이 커트만 하는 가격에 머리 감으면 추가되고, 드라이하면 또 추가된다. 스타일링을 하면 더 비싸고. 그런데 미용사가 다 자른 후 고대기로 스타일링을 해준다. 요청하지 않았는데 스타일링을 하고 나니 훨씬 머리 스타일이 예쁘다. 우리 둘 다 맘에 들어 카운터 직원에게 저분 머리 잘하신다고 칭찬해 드렸다. 직원은 기뻐하며 꼭 전해주겠다고 말한다.


우린 기분 좋게 점심 먹으러 갔다. 호텔에서 아침을 많이 먹었기에 점심을 간단히 먹기로 하고 호텔 앞의 비건 식당에 갔다. 렌틸콩과 밥 혹은 태국식 카레에 샐러드 두 가지를 선택해 먹을 수 있었다. 완전 건강식이라 마음에 쏙 들었다. 다만, 종이 식판 그릇에 나무 포크, 스푼, 나이프로 모두1회용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설거지할 필요 없어 편하겠지만, 이 많은 것들이 쓰레기로 버려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밥을 먹으며 조카는 머리가 예쁘게 잘 된 것 같다며 레이어드 된 옆머리를 만졌다. "엇!" 나는 놀라서 옆머리를 잡았다. 머리카락 두 세 가닥이 길게 늘어졌다. 길이가 맞지 않는다. 뒷머리가 옆으로 왔나 싶었으나 옆머리였다. 아마 자를 때 뒷머리 쪽으로 갔었던 듯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앞머리, 뒷머리, 옆머리 구획을 나누더니. 우린 어이없어 웃었다.


호텔 방에 돌아와 손톱깎이 세트에 있던 아주 작은 가위로 삐죽 나온 머리 몇 가닥을 잘랐다. 조카는 혹시 더 삐죽 나온 곳은 없나 머리를 양 옆으로 내려 살펴보다가 황당하게 말한다. "이모, 이거 봐요. 머리 길이가 달라요!" 양쪽 길이가 살짝 다르다. 우리는 서로 기가 막힌 웃음을 짓다가 내가 말했다 "머리를 그렇게 양 옆으로 내리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괜찮아" 애써 조카를 달래는 말을 하며 머리를 자세히 보니 뒷 머리끝이 삐죽 빼죽이다. 한마디로 '쥐 파먹은 모양'이다. 조카는 시무룩하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말한다. "괜찮아요, 자세히 안 보면 몰라요. 그래도 머리끝이 다 상했는데 그거 자르고 났더니 머리에서 윤기가 나는 것 같아요"라며 아주 긍정적인 말을 한다. 조카는 뒷머리가 좀 더 가벼운 느낌을 원했으나 무겁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요구를 하지 못하고 미용사가 하는 대로 놔둔 거다. 하도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일하는 사람이 난처해할까 봐 말을 못 한 거다. 조카나 나나 뭔가 요청해야 할 일을 잘 말하지 못할 때가 있다.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방에서 머물다 저녁 먹으러 나갔다. 조카가 수개월 전부터 돈가스를 먹고 싶었는데 웰링턴에서는 파는 곳을 찾지 못했다고 하여 먹으러 가기로 했다. 시내에 있는 일식당 파스가츠(Paskatsu)라는 곳을 검색해 갔다. 이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가 파스타+가츠를 얹어 먹는 것이어서 이름이 "파스가츠"라고 한다. 일식당인데 일하는 사람 모두 한국인이다. 메뉴에는 한국식 돈가스도 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인지 잘 모르겠지만, 직원이 아주 당연하게 한국말을 건네서 놀랐다. 대개 "한국인이세요?"라고 묻고 말을 하는데 그녀는 그냥 자연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딱 봐도 한국사람 같긴 한 것 같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나는 데리야끼 치킨 덮밥을 시키고 조카는 일반 돈가스를 시키는데 직원이 어떤 사이즈로 주문하겠냐고 물어본다.


"라지 사이즈는 얼마나 커요?" 조카가 묻는다.

"성인 남자가 먹는 양이에요"라고 직원이 답한다.

"라지 사이즈 주세요" 나는 놀라 물어본다. "다 먹을 수 있어?"

"네! 저 많~~ 이 먹어요"

돈가스가 나왔다. 일반적으로 보는 접시 두 배 반쯤 큰 접시 한가득 돈가스가 나왔다.

조카는 접시를 아주 깨끗하게 비웠다. 너무 먹고 싶었다면서. 역시 한창 크는 스무 살짜리는 다르다.


한국인 미용실에서 일본인 미용사에게 머리를 하고, 한국인이 일하는 일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비건 식당은 뭔가 더 친환경적이란 느낌이 있는데 일회용품을 잔뜩 쓰는 식당에서 먹었다. 묘한 날이다.

하루 종일 비 (10:17, 15:4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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