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찌개

2025. 7. 25

by 지홀

친구 회사 근처에서 점심 먹기로 약속했다. 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나가며 "지금 출발한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당황한 목소리다.


나와 한 약속을 깜빡 잊고 다른 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뭐라고?" 황당하고 좀 화가 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 우리가 적어놓지 않으면 완전히 잊어버리기 쉬운 나이지'


친구는 너무 미안해하며 만날 날짜를 다시 정하고 우리 회사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오늘 점심은 혼자 먹었다. 바람맞은 날, 찌는 더위에 지쳤다. 식당에 들어가 뭘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김밥 한 줄을 사 도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왜 벌써 오냐며 놀라는 동료에게 약속 날짜를 착각했다며 둘러댔다. 바람맞았다는 말 보다 내가 정신없다고 말하는 편이 체면을 차리는 일 같았다.


맑다, 맑다, 맑다 (11:47, 18:45, 18:45)


극단 20주년 공연을 올릴 극장에 답사하러 갔다. 오퍼실, 분장실, 무대 규모 등을 둘러보며 우리가 그간 공연했던 무대보다 층고가 월등히 높고 분장실 규모가 역대급으로 커서 만족스러웠다. 무대의 높이도 꽤 높았다. 소극장에서 관객석과 바로 마주하지 않는, 관객석과 무대가 떨어졌고 심지어 관객이 무대 위를 약간 고개 들고 봐야 하는 무대다. 이번 공연의 배우 수가 12명인데, 분장실에 다 들어갈 수 있다. 조명은 아날로그 조명만 설치된 곳이다. 요즘 LED 조명을 많이 써서 우리도 고민했는데, 연출과 조명디자이너가 즉석에서 LED 조명은 쓰지 않기로 했다. 따라서 조명 콘솔도 극장에 비치된 것만 사용하기로 했다. 콘솔 대여료를 아끼게 되었다.


답사 후 운영진 회의까지 거의 한 시간이 남았다. 점심에 김밥 한 줄만 먹어 배가 너무 고팠다. 6시부터 배고팠는데 시간이 없어 답사 후 먹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다른 단원들은 다 저녁을 먹고 왔다고 했다. 떡볶이 같은 매콤한 음식을 먹고 싶었기에 혼자 찾아가려는데, 연출이 김치찌개 집을 추천한다. 3,000원짜리 식당이 있다고. 메뉴를 들었을 때는 그다지 갈 마음이 들지 않았으나 3,000원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식당 이름이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이다. 청년문간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후원금을 받는다. 가게 안이 무척 깔끔하고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다. 거기에 라면, 어묵, 고기 등을 추가할 때 추가비가 있고 밥은 무제한 공짜다. 반찬은 콩나물 한 가지다. 셀프로 주문, 배식, 퇴식을 한다. 일하는 직원은 테이블을 닦는 일을 한다. "청년밥상문간"은 총 다섯 곳에 식당이 있는데 대학로점은 슬로우점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붙었다. '경계선 지능(느린 학습자)' 청년의 근로 가능성을 알리고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을 응원하기 위한 상생일터라고 설명되어 있다. 풍요롭지 않은 청년들이 마음껏 먹고 기운을 내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그 기초가 되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취지가 뜻깊었다.


단순히 싸다는 이유로 들어간 식당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자 '내가 이곳에서 밥을 먹어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식당 안에는 20대로 보이는 청년들이 많았고 배우들이 간혹 보였다. 그러다가 나의 식사가 매출을 일으킨다는 생각에 미치자 좀 편안해졌다. 사람들이 많이 알고 이용할수록 사업이 번창하는 것이므로. 후원하고 싶으면 식당에 마련된 후원함을 이용하거나 정기 후원을 해도 되고. 김치찌개는 아주 익숙하게 아는 맛있는 맛이다. 종갓집 김치를 쓴다고 한다. 찌개에 두부와 돼지고기가 적절히 들어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김치찌개에 들어간 몇 점의 돼지고기는 맛있다. 지나치지 못하고 다 먹었다. 떡볶이는 아니지만 매콤하게 먹을 수 있어 하루의 더위가 다 가시는 기분이었다.

뜨겁지만 않다면 언제까지라도 하늘을 보고 싶은 예쁜 광경 (19:17, 19:40,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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