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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녹음

2025. 8. 3

by 지홀

오늘따라 나뭇잎들이 무척 푸릇푸릇하다. 굳이 공원이나 산을 가지 않아도 도심 속 나무들의 녹음이 짙은 걸 볼 수 있다. '사람은 한 여름의 더위로 지치지만 나무들에게는 생명을 꽃피우는 절정의 시기이구나'


푸르른 나뭇잎은 나뭇가지에서 영원할 것 같은 생명력을 뽐낸다. 그런 짙은 색의 나뭇잎을 보노라면 그 싱싱하고 청량한 기운이 기분마저 좋게 한다. 마치 두려움 따위 없이 도전과 열정, 패기로 넘치는 젊은 날 같다. 겨우내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살아 있을까 궁금할 정도였는데, 어느새 울창해졌다. 지나가는 가로수를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낄 정도인데, 식물을 가꾸는 사람들은 그 변화에 얼마나 경이로움을 느낄지 상상된다.


친구 중에 원예를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 아파트에 살 때부터 베란다에 각종 식물을 키웠는데 남편이 은퇴하자 둘이 가평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 전원주택을 마련하여 정원을 가꾼다고 한다. 처음 이사했을 때는 정원에 들일 예산을 정해놓았단다. 정해진 돈만큼 씨를 사고 가꿀 생각이었는데 하다 보니 점점 더 많은 씨앗과 묘목을 사게 되어 예산 초과 상태라고 했다. 정원을 가꾸다 보면 이것도 심고 싶고 저것도 심고 싶어서 자제하기 힘들다며 웃었다. 매일 아침, 점심으로 정원 일 하다 저녁에 일찍 자는 일상을 보낸다고 한다. 매일 들여다봐도 매일 할 일이 있다는 말이 놀랍다. 볼수록 더 손이 가고 돌보게 되는 일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림도 볼수록 더 그려야 할 곳이 보인다. 지난번에는 보지 못한 그림자, 알아채지 못했던 빛이 다음에 보인다. 그 빛과 그림자를 그리다 보면 주변의 물체, 풍경도 조금씩 더 손을 봐야 한다. 그림의 완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는 사람에 달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조금 이해된다.


눈에 보이지 않아(인지하지 못해) 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의 기억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각, 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전부 다르다. 엄마가 언제 발목을 삐고 깁스를 했는지 시간이 지나면 모른다. 시기만 기억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에 없는 경우도 있다. 당사자인 엄마만 알 뿐. 내가 언제 하지정맥 수술을 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당사자인 나만 알 뿐.


눈으로 본다는 건 깨닫는 과정인 것 같다. 보이니까 보는 것 말고 눈으로 보되 머리로 인지하지 못하는 스쳐 지나는 것 말고, 제대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는 것의 시작점은 마음을 담아 바라보는 일이지 싶다.


데카르트의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마음을 쏟아 상대를 살펴야 그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상대가 존재함을 인지함으로 해서 내가 존재한다.

녹음이 짙어진 나무, 태아의 초음파 사진같은 구름(11:52, 19:2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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