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타인의 아픔

by 지홀


웹툰 ≪나는 이 집 아이≫ 작가 코튼 (웹소설 작가 시야)
제57화 교사 하멜과 여주인공 에스텔의 대화

“저는 지금 공녀님과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만, 5년, 10년 후에도 과연 그럴까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5년, 10년 후에도 소중한 정보로 남아 있을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신뢰를 얻지도 쌓지도 못하잖아요.”
“제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당연하죠?”
“그렇다면 저도 노력해야겠군요.”

얼마 전,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중 정치인들의 비리가 발각되는 증거물로 녹음파일, 수첩 등이 나온 것을 두고 기록을 잘하지 않는 한 직원이 우스개 소리로 말했다. "가만 보면 기록 잘하는 사람들이 감옥 가더라고요. 그런 거 보면 저는 죽었다 깨나도 감옥 갈 일은 없겠다 싶어요." 우린, 한바탕 깔깔대고 웃었다.


각종 사건, 사고 뉴스를 듣다가 매번 깜짝 놀라는 지점이 있다. 바로 녹음파일이나 문자 캡처가 공개되는 부분이다. 그것도 수년 전에 주고받은 통화, 문자 내역이다. 당사자는 친하다고 여겨 비밀이든 속내든 말했을 텐데 그게 자신의 발목을 잡는 증거로 사용되는 걸 보면 배신감을 느낄 것 같다. 반대로 녹음하고 캡처해 놓은 사람은 사안에 따라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일이 잘못됐을 때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일을 처음 배울 때, 선배가 일이 잘못되면 누구의 실수로 벌어진 일인지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 생기므로 그때를 대비해 항상 문서로 남겨놓으라는 말을 했다. 말로 주고받은 건 혼란만 가중될 뿐이라고. 그래서 업무 의뢰를 받고 처리할 때 가능한 문서로 남겼고 구두로 주고받은 내용은 날짜, 시간, 대화 나눈 상대 이름을 메모로 남겼다. 업무 파트너, 고객, 사내 직원 등 뭔가 깔끔하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일을 할 때 기록했다. 일이 벌어지면 수습하는 게 먼저지만, 수습이 끝나고 나면 어디서 일이 틀어진 건지 원인을 찾게 된다. 그래야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므로. 그때 메모 기록과 문서가 유용했다. 내가 잘못한 건 시인하고 잘못하지 않은 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실수 정도로 넘길 수 있는 것들이라 큰 문책이 따르는 일은 없었다.


단순히 잘잘못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숨을 위협하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도 있는 무기들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 무섭다. 당사자간 갈등이 증폭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증거물이라니. 그러니 말하지 않는 것이 상책일지도 모른다. 간직해야 할 말은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 나의 치부이든 뽐내는 것이든, 악용되려면 어떤 방향으로 포장되어 사용될지 모르므로.


그럼에도 서로 신뢰를 주고받는 관계라면 속내를 털어놓아야 더 가까워진다. 그렇지 않다면 겉도는 관계로 머물게 된다. 설령 그 믿음이 배신당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읽지 못한 나의 문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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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여주인공 에스텔이 전쟁에서 홍수를 일으켜 적군을 물리친 후, 내적갈등 끝에 한 말.

“타인의 아픔이란 나의 기쁨에 밀려서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아픔, 슬픔, 불행 그 모든 것이 타인의 것이라면 그저 잠깐 멈칫하고 위로를 건넬 뿐이다. 위로는 진심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 단지 당사자가 아니므로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의 깊이와 넓이인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쉽게 잊어버린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가족일지라도. 인류애가 부족하거나 비인간적인 게 아니라, 각자 삶의 주인공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