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악녀는 대공을 사로잡았다 ≫ 작가 뺨, 제182화
여주인공 슈에르의 철칙
"친분을 쌓기도 전에 동정심을 자극하려 드는 사람은 사기꾼 아니면 정신이 아픈 사람이라는 것."
삼십 대 초반, 회사 일로 해외 출장을 갔을 때다. 업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행사에 참가하는 출장이었다. 첫날인가 마지막 날에 주최 측에서 참가자들 전부에게 만찬을 제공했다. 네트워킹 시간을 제공한 셈이다. 업계 사람들이라 친밀하지는 않아도 서로 얼굴과 이름, 상대방의 대략적인 경력을 알았다. 딱 그 정도의 정보만 아는 사이였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주최 측의 한 직원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듣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의아했다. 부인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고민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얘기들이었다. '도대체 우릴 언제 봤다고 이런 얘기를 하지?'
남의 부부사이가 좋은지 나쁜지에 관심 없다. 게다가 여자들이 대부분이던 그 테이블에서 자신의 부인을 디스 하는 말을 하다니. 공감하기도 어려운 얘기였다. 듣기 거북해 화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때는 그런 자리를 털고 일어날 주변머리가 없어 그냥 듣기만 했다.
지금은 직장 동료, 특히 상사에게 사적인 얘기를 잘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일상적인 얘기를 서로 나눴다. 휴가 때 어디에 다녀왔는지, 집에 걱정거리가 뭔지, 주말엔 뭐 하고 시간을 보냈는지 등 대체로 가벼운 얘기들이다. 굳이 알려고 캐묻지 않아도 서로의 전공과 대학은 어디인지, 좀 더 알면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는지를 자연스럽게 알았고 아주 친하면 사적 친구관계까지 알았다. 친한 선, 후배와 동료는 여전히 내 사정을 안다. 아니, 서로 사생활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의 상호 연결된 삶이란 그런 거니까.
그래서 동료의 사정을 알고 나면 이해하는 마음이 생긴다. 부모님이나 아이가 아프거나 실연을 했거나 신상에 힘든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면 지각을 하더라도, 일에 집중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정을 봐주고 내가 도와줄 것이 없는지 살피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일에 지장을 줄까 봐,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는다. 꾹 참고 지낸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고 타인의 동정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름 친한 줄 알았는데 힘든 내색을 전혀 하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좀 서운하다.
자신의 안 좋은 상황을 얘기하려면 상대방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어야 공감하고 받을 수 있다. 친분이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건 거의 일회성에 한해서다. 어쩌다 한, 두 번 업무를 대신 처리해 주는 정도로 선의를 표할 수 있다.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난다. 친분이 별로 없는데 그저 한 팀이 되었다는 이유로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얘기하며 자신이 현재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고 양해를 구한다.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동정심을 자극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자신의 몫을 남에게 넘기는 것도 한, 두 번이고 잦은 휴가에,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걸 양해할 수 있는 기한도 정해져 있다. 수개월, 1년 내내 그 사정을 봐주기는 어렵다. 그 기한이 넘었는데도 해결하지 않는다면 동정심을 자극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사기꾼이다. 타인의 선의를 이용하여 무임승차하는 경우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도 잘 풀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휴직하고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 편이 자신과 타인을 위하는 길이지 않을까. 왜냐면 기간이 길어질수록 옆의 동료들은 동정심이 사그라들 것이고, 당사자는 점점 더 고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채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건강해지는 치료를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