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28
"여러분, 사랑해요."
라디오 디제이가 클로징 멘트를 한 후 이렇게 덧붙였다. 이십 년 전쯤 얘기다. 그 시절 나는 출근 준비를 하며 라디오를 들었고, 밤에도 자주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척 낯설고 의아했으며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랑한다고?' 언제 봤다고 '사랑'이란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와닿지 않는 인사말이었다. 내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가볍게 취급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무척 무겁고 진중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 후로 많은 연예인이 팬들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기 시작했다.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입에 발린 말을 들을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졌고 해당 연예인에 대한 호감도는 낮아졌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도, 소중하고 신중하게 써야 할 말을 저렇게 가볍게 입에 올리다니! 불쾌했다. 무릇 '사랑'이란, 그 감정을 쌓아 올린 관계에서만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불특정 다수에게 퍼주는 말로 써도 되는 건가?
연인은 물론이고 부모님, 형제자매에게도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탓에 이 단어는 오랫동안 글로만 읽거나 쓰기만 했던 단어다.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말하고 싶어도 쑥스럽고 어색해서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단어이기도 하다. 글자로만 존재하는 단어를 부모님이나 남자 친구에게 어쩌다 쓰게 될 때(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 적을 때다)는, 여러 번 마음을 가다듬으며 내 사랑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검열하며 적었다. 특히 연애편지를 쓸 때는 정말 '사랑'이란 단어를 적어도 되는지 여러 번 고민했다. 편지뿐 아니라 말로 하려고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인 적도 있으나 끝내 소리로 내뱉지 못했다. 여전히 지금도 말로 하기 어려운 단어다.
조카는 수시로 부모님과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동생이 그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조카는 처음 그 단어를 말할 때 무척 어색했지만, 자꾸 얘기하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부모님과 나는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꽤 당황했다. 한동안 못 들은 척하며 대충 “조심해서 가”, “잘 지내” 같은 말들로 서둘러 덮어버렸다. 조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뵈러 왔다가 갈 때는 늘 "안녕히 계세요, 사랑해요"라고 인사한다. 포옹과 함께. 엄마와 나는 포옹은 마주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에는 계속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린다. (아빠는 포옹도 어색하게 하신다) 가끔 "그래, 나도~"라고 화답할 때가 있지만, 정확하게 "나도 사랑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조카의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 좋다. 의례 하는 말로 치부하지 않고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그 단어에 담긴 의미까지 가볍게 여겨지진 않는다. 정작 그 아이는 그 말의 무게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인사처럼 말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지 않다. 불쾌하지 않다. 자주 듣다 보니 사랑이란 단어가 익숙하고 언젠가는 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도 있으므로.
영어를 배울 때 'like(좋아한다)'보다 더 강하고 깊은 감정이 'love(사랑한다)'라고 배웠다. "I love music", "I love traveling"처럼 'love'를 넣어 강조한다. 그걸 우리말로 할 때 "여행 좋아해"라고 하지 "여행을 사랑해"라고 하는 경우가 드물 뿐이다. 하지만, '좋아한다'보다 더 큰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연극, 아이돌, 배우, 드라마 등등. 한때 미드 "The X-Files"의 열혈 팬이었을 때 두 남녀 주인공을 아주 사랑했다. 팬들끼리 서슴없이 "Mulder"와 "Scully"를 "사랑한다"라고 했다. '좋아한다'로 퉁치기에는 그 마음이 너무 열정적으로 컸기 때문에.
카톡 기능 중에 상대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는 이모티콘이 있다. 웃는 표정, 놀란 표정, 시무룩하거나 슬픈 표정이 있고, '최고야, 멋져, 잘했어'라는 의미의 엄지척, '알았다, 알아들었다'를 의미하는 체크(V) 표시 그리고 '네 말에 동의해, 네 말을 좋아해' 등의 의미를 지닌 하트(❤) 표시가 있다. 처음에는 하트 표시를 잘 누르지 못했다. '동의한다, 공감한다, 내 말이~' 등등의 의미로 더 많이 쓰는 것을 알고 난 후에야 하트 표시를 자연스럽게 누른다. 가끔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표시이고, 때로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아부성으로 누르기도 한다. 하트를 누른다고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자 연예인들이 팬들을 향해 사랑한다고 외치는 건 '고맙다'의 또 다른 말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그저 고마운 마음보다 더 크고 강하게 고마운 마음의 표현으로. 그렇게 수긍하자 "여러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연예인들이 예뻐 보인다.
나도 예전보다 일상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훨씬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난, 뉴질랜드를 사랑해", "난, 와인을 사랑해", "난, 연극을 사랑해"라고.
하지만, 사람에게는 여전히 잘 건네지 못한다.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있다. "000은 연기를 잘하지 못해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의리로 드라마를 보잖아"라면서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친밀한 사람에게는 아직 건네기 어려운 단어다. 이제는 단어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이 아니라 습관의 문제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조카처럼 연습하고 자주 말하다 보면 나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