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는 오랫동안 쓰고 열매는 달지만 금방 사라진다.
나름 처음부터 끝까지 내 아이디어로 된 제품이 출시되었다.
그동안 초차 신인인 내가 하는 디자인이란 있던 제품 수정하는 디자인이나
고객님의 아이디어를 시각화해주는 디자인들만 거의 도맡아 했었는데
이번 건은 무려 여러 다른 디자인 전문회사들과 경쟁까지 해서 따낸 패키지 디자인이라 나름 뿌듯하다.
얼마나 많은 디자인 아이디어들이 샘플도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렇기에 내 생각엔 디자이너가 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은
결국 본인이 디자인한 제품이 실제로 팔리는 바로 그 순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제안부터 실제 생산까지 거의 1년은 걸린 거 같다.
물론 가격적인 이유로 내가 원했던 종이도 아니요 컬러도 아니어서
(종이 넘버와 팬톤 컬러까지 상세히 써서 첨부했건만!!! 왜!!!!)
처음 이 아이를 샘플로 만났을 때 이미 엄청 속상했었고
담당 영업 팀장이랑 한바탕 할 뻔까지 했다.
언제나 이런 식의 절충된 디자인 제품을 보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사라 퍼거슨이 찜한 이 디자인이 내 아이디어가 아닌 것도 아니라서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가 그 종이랑 컬러도 괜찮다고 했단다.
그러나 이건 정말 내가 원했던 블링블링이 아니다. 더 화려하고 예뻤단 말이닷!!!!
그렇기에 내 포트폴리오에는 내가 원한 소재로 렌더링 된 제품을 넣을 예정이다.
내 포폴인데 뭐 어쩔 거임?
아직도 Montagrappa 웹사이트에서 판매하고 있다.
우리 회사는 100% 디자인 전문회사가 아닌 관계로
디자이너들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조금 슬픈 일이다.
고객이 원하는 걸 맞춰드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사장님의 개인적인 취향과 영업팀의 가격적인 취향까지 덧붙여서 충족시켜 드려야 한다.
한국보다 강도는 세지 않지만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그나마 우리 팀장은 감사하게도 우리의 디자인에 크게 터치를 안 한다.)
언어의 제약으로 인해 말보다는 그림으로 설명하는 게 편하지만
10년 가까이 공부한 나름 디자이너인데
이런 이유로 이래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그 누군가의 '내가 해봤는데 안돼' 혹은
돈이 안된다는 수학적인 계산 아래 번번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황금률도 나름 수학인데 왜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도 안다. 내가 큰 목소리를 낼만큼 톱클래스는 아니라는 걸.
국제 공모전에는 나가본 적이 없어서
국제적으로 내 디자인이 잘 통하는 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아름답다는 감정은 사실 매우 주관적인데다 30년 가까이 한국에서 살던 동양인이
유럽인이 좋아할 만한 감성으로 디자인한다는 건 어쩌면 너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국에서 상도 몇 번 받고 디자인으로 밥도 벌어먹고 살던 사람인데
다시 해야 한다는 말에 두말없이 다시 작업할 수밖에 없다. 나는야 월급 쟁이니까.
디자이너는 자존감과 관련해서는 정말 그다지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직업군이라고 생각한다.
고객과 영업팀 그리고 테크닉팀과 생산팀 그 어딘가의 중간에서 무언가를 조율해야 할 경우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답게 늘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도 순간순간 나를 주눅 들게 한다.
창의적인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의 문제라던데,
내 의견이 강해도 문제고 없어도 안된단다.
돈이 안되면 디자인 탓이니까 최악의 경우 남의 잘못을 뒤집어쓰기도 좋다.
그래도 나는 이 일이 아직 싫지는 않으니 어쩐담.......
고생을 사서 하니 정말 이 병을 어찌하오리까.
Photos by
https://www.montegrappa.com/en/collections/edizionilimitate/duchess-1191.html?c=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