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연말파티

by 우물

그 날은 몹시 추웠다. 어스름이 땅을 뒤덮기 전 서면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문을 나서는 순간 몸안으로 꾹꾹 눌러담아 놓았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코트 속으로 추위가 파고든다.
서면에 도착하고 모임 장소에 가기 까지 한시간 이상이 걸렸다. 녹색계열의 드레스코드가 나에게는 큰 숙제였다. 서면 지하상가 부터 삼정타워, 구도서관 앞의 여러 옷가게를 둘러보면서 어떻게 코디를 해야 받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을까 하는 무게감이 나에게 있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그 만큼 그대들을 만나는 것이 기대가 되었나 보다.
어찌어찌 초록색 비니 모자를 찾아서 거울 앞에서 둘러 써본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이 어색해서 머뭇머뭇 하게 된다. 그래서 좀 더 괜찮은 아이템이 없을까하여 여러 곳을 둘러본다. 그렇게 그대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더이상 시간이 선택을 허락하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부족한 믿음은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넣고 그렇게 모자를 선택해서 눌러쓴다. 애써 만져놓은 머리가 망가지는 것이 조금은 아쉽긴 하다. 그래도 어쩌리 주어진 시간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약속된 장소는 ‘공간겟츠’. 네이버지도를 손 위에 놓고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걸어간다. 교보문고 맞은편 큰 도로, 스팀펑크 촬영이라도 할 듯 타이어가 가득쌓여 있는 매장 옆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빨간색 옷을 두른 한 사람이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토끼 처럼 나의 걸음을 이끌어준다. 엘리스는 지하로 나는 2층으로. 조심조심 계단을 오르고 나니 반가운 얼굴들이 3번이라는 명찰을 건네주며 컵두개와 좌석을 안내해준다. 마치 은밀한 약속이 진행되는 것 처럼 어색한 나를 제외하고 모두 정돈된 느낌이다. 초록색 빨간색 포인트를 준 사람들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서로 즐거운 듯 이야기하고 있다. 나 혼자만 타인이 된 느낌이지만 어느 순간 적응하여 나 이외의 타인을 여유있게 기다린다.

권호님은 짐빔하이볼을 4캔 가득 가져오셨고 광현님은 버드와이저를 테이블 가득 채워놓으셨다. 누군가는 와인을 누군가는 소맥을 말고 있는 모습을 보며 술을 마시는 즐거움이 슬몃 부러웠다. 나는 술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즐겨마시지도 않지만 그 순간에는 차를 끌고 올 수 밖에 없는 나의 상황이 아쉽긴 했다. 술을 마실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의 내면에 또 다른 자아는 디오니소스가 벌이는 축제처럼 사람들과 함께 술을 진탕마시고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욕망한다.

술을 못마시는 것에 반해 음악은 적확하게 나의 입맛이었다. 이루마의 곡과 드뷔쉬의 달빛. 다채로운 음악, 물론 중간에 소령님의 메탈리카적 트로트곡이 있었지만, 피아노 위를 굴러가는 음들이 나의 귀를 즐겁게 했다. 낯선 이들과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고, 어두운 조명아래에서 내 귀를 간지럽히는 음악이 갑자기 들리면 그 순간 다른 세계로 흘러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최근에 일련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에 대한 무게와 내 삶의 무게를 잠시 잊고 그 자리에서 웃고 즐길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한 이세계였다. 어린시절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피터팬은 책 속에 그리고 내 상상 속에 있었지만 그 순간 나의 세상이 새로워지는 것은 결국 꿈 속에서나 봤을 법한 풍경과 현실이 만날 때인 듯 하다. 사람들과의 따스한 크리스마스 파티. 새로운 만남에 대한 호기심과 즐거움. 그 날 마셨던 음료와 음식의 맛은 희미하지만 그 날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공간겟츠를 가득 채웠던 피아노 소리와 그 장면장면들은 평생 잊혀지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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