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인생에서 원했던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산복도로 위 옹기종기 모여 있던 친구들의 집과 나의 집은 그 높낮이가 비슷했기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의 욕망에는 비교가 없었다.
그저 새벽 우유 배달을 나간 엄마가 조금 일찍 돌아오는 것.
퇴근길 아빠의 손에 들린 과자 혹은 초콜릿.
친구들과 술래잡기 때 좀 더 빨리 달리는 것들.
초등학생이 되면서 친구집에 초대를 받아 갔던 생일파티.
남포동에 레코드판매점을 하던 그 친구의 집은 1층은 레코드가게였고 4층이 거주하는 집이었다.
균열은 타자의 세계를 목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생경한 가구들과 넓은 방, 그리고 '거실'이라 불리는 그 낯선 안락함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내 세계의 지평은 처음으로 흔들렸다.
단순했던 사소함들이 시시해지기 시작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타인 속에 있는 내 위치를 깨닫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하는 것의 밀도와 그 부피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비대해진 욕망 사이의 간극은 깊은 균열을 만들어냈고, 그 틈으로 유년의 안식은 속절없이 빠져나갔다. 그때부터 삶은 누려야 할 축복이 아니라, 쟁취해야 할 투쟁의 전장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부모로부터 선생으로부터 그렇게 배웠을지도.
30년의 세월을 지나온 지금, 역설적이게도 내가 원하는 것은 다시 사소해졌다.
창틀을 타고 흐르는 햇살 한 줌, 식어가는 커피 한 잔의 여유,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다정한 이들, 그리고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독서의 시간. 그런 것들이 지금 내가 원하는 것들의 대부분이다.
투쟁의 무용함을 깨닫고 사라지는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한 나의 태도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전장에서 꼬리를 말며 도망치는 ‘마케이누(負け犬)’의 비겁함일지도 모른다. 발버둥 쳐도 닿지 않는 것들을 외면하기 위해, 다시 욕망의 크기를 줄여버린 자기 방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을 뒤바꿀 기회들을 묵묵히 흘려보낸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이제는 외부의 성취가 아닌, 무너져가는 자아를 스스로 긍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도래했음을. 이토록 고집스럽게 글을 써 내려가는 행위는, 어쩌면 비루한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마지막 제의와 같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내가 이 문장을 습관처럼 되뇌는 이유는, 타인의 기준에 가닿지 못한 나의 초라함을 ‘추종하지 않는 태도’로 근사하게 포장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만이 내가 타인에게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실존의 양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가진 것들이 아닌, 나라는 존재 그 자체로 나를 증명하려는 이 처절한 안간힘.
이 사소한 평안은 도망친 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자가 얻어낸 고귀한 전유물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