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눈

악마와 미스프랭을 읽고

by 우물

빛과 어둠. 선과 악. 천사와 악마
파올로 코엘류는 <악마와 미스프랭>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하나의 존재 안에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의 마음이 동시에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우리 안에는 과연 누가 살고 있는가. 빛과 어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세계는 어쩌면 우리가 눈을 뜨자마자 마주해야 했던 세상의 첫 번째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내가 아닌 '너'를 인식하는 순간 분리가 시작되듯, 선과 악의 구분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필연적인 몸짓이었을 것이다.

문득 아이의 첫마디를 떠올려 본다. 아기가 내뱉는 "엄마" 혹은 "아빠"라는 말속에는 실체에 대한 호명보다 더 깊은 내면의 갈망이 숨어 있다. "배가 고파요", "나를 안아주세요"라는 그 뜨거운 생존의 욕구가 언어라는 외피를 입고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의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선과 악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행위 역시 그와 닮아 있다. 내면의 혼돈을 잠재우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의 물질에 자신만의 언어를 입히며 살아가는 존재다.

사람들은 흔히 타인을 악마화함으로써 자신이 천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 속 신부가 베스코스 주민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악'을 정당화했듯이, 우리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타인의 행동을 가혹하게 규정하곤 한다.
하지만 빛이 없다면 어둠의 명암조차 깔릴 수 없듯, 악마가 없다면 천사라는 존재는 그 형체를 유지할 수 없다. 결국 타자를 향한 날 선 심판은, 나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고 싶은 비겁하고도 절박한 본능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은 어쩌면 그저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조로아스터에서 시작된 빛과 어둠의 이야기에서 성경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까지. 사람은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인간으로 마땅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십자가에 걸어 못 박아 자신들의 광장 한가운데 걸어놓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장 5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3장 22절>

창세기 속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한 입 베물었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처음으로 마주한 감정은 '수치심'과 '두려움'이었다. 선악을 아는 일이 신의 영역에 닿는 것이라 했으나, 불완전한 인간이 마주한 것은 오히려 자신의 벗은 몸, 즉 스스로의 연약함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오래된 신화의 광장 한가운데 서서, 내가 세운 십자가에 타인을 못 박으며 내가 '신의 눈'을 가졌노라 착각하곤 한다. 내가 생각하는 선이 선이 되고, 내가 정의한 악이 악이 되는 이 오만한 모사는 인간이 가진 가장 슬픈 한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문명은 바로 그 '불완전한 구분' 위에서 꽃을 피웠다. 우리가 휘두르는 선악의 잣대가 비록 휘어지고 부러진 것일지라도, 무엇이 옳은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 지독한 갈등의 시간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했다. 완벽한 신의 저울은 가질 수 없지만, 끊임없이 무게를 달아보려는 그 구차하고도 숭고한 노력이 무질서한 혼돈 속에 질서의 길을 내었다.

인간은 결코 타인을 온전히 심판할 수 없는 미완성의 존재다. 하지만 그 미완성을 메우기 위해 선을 갈망하고, 악을 경계하며, 서로의 행동을 해석하려 애쓰는 그 과정 자체가 바로 인류가 이어온 생존의 방식이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비록 신을 닮으려 애쓰다 넘어진 서툰 모방자일지라도, 그 서툰 구분이야말로 인간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지팡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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