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대화를 하고 싶을까
나는 나의 말들이 무겁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말에 목적이라는 고삐를 매어 두고 싶지 않다.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사유와 유쾌함의 파편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래서 특별한 깊이도 이해도 중요하지 않다.
대화를 하는 주체로서 나와 그리고 나의 대화가 그저 휘발되지 않도록 그대들이 필요한가 보다.
기억이란 다소 불편하고도 편리하여 명확한 내용보다는 그 순간의 느낌은 고스란히 간직한다.
흔히들 대화를 목적에 종속된 행위로 이해한다.
진화론적 입장에서는 초기 선조들이 위험을 인지했을 때 알리는 목적으로 대화를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식량을 걸고 밀고 당기는 기나긴 과정을 위해 대화를 했을 것이다.
즉, 생존을 위한 협력의 기술로서 언어가 사용되어지고 진화했을 것이라고 진화론자들은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초기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했을까.
대화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단순히 생존에 대한 수단이라기보다 훨씬 근원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언어가 발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기도라는 행위조차도 신에게 닿기를 바라는 대화이지 않은가.
사람은 그렇게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증명되기를 바라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도 대화를 나눈다.
의미 없는 잡담 속에서 웃고, 결론 없는 토론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만약 대화가 단지 ‘수단’이라면, 이런 행동들은 그저 비합리적인 행동이며 비경제적 행동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비합리성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징표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보면
주인공은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것은 육체적 고통보다도 철저한 고립임을, 주인공이 얼굴을 그리고 이름을 붙여준 배구공 ‘윌슨’을 통해 표현된다.
고독은 곧 “나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상태”이다.
영화에서 ‘윌슨’은 대화의 근원적 의미가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에 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고립된 섬처럼 홀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세계 속에서,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다.
대화는 단순한 말의 교환이 아니다.
한 마디의 말에는, 그저 소리가 아니라 나의 세계가 담겨 있다.
너의 응답 속에서도 나는 너의 세계를 엿보고,
그 순간 우리의 세계는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조금 더 넓어진다.
대화는 곧 존재가 자기 자신을 열어 타자에게 건네는 행위,
그리고 타자의 응답 속에서 다시 나를 발견하는 여정이다.
내게 있어서 대화는 어떤 결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이미 목적이고, 하나의 완결된 경험이며, 그 순간이 담긴 즐거움이다.
대화를 통해 느끼는 즐거움과 따뜻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가 서로를 통해 드러나고 빛나는 순간을 체험하는 기쁨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 우리는 언어라는 집 안에서 함께 머문다. 그 안에서 나와 너는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세상이 열리는 것을 경험한다.
대화란 결국, 존재가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길을 걷는 작은 희망이라 생각된다.
함께 존재하는 서로를 이해하고, 그 이해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너와 대화가 하고 싶은가 보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냥 너랑 함께 있고 싶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