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통

by 우물


책을 읽다 보면 갖지 못한 타인의 삶에 대한 부러움에 휩싸인다.

주인공의 삶이 빛나게 부유한 순간에도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쓰러지는 순간에도 그 삶이 부러워지면 한 번쯤 읽던 책을 덮고 쉼을 가진다.

그러면서 나는 너무나도 쉽게도 타인의 삶을 욕망하는 동시에 내 삶을 진지하게 사랑하고 있지 않구나를 깨닫게 된다.


평범한 삶과 평범한 일상.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했을 일상의 지루함.

그 지루함이 평화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다고 여긴다.

결국 모든 깨어짐은 비교에서 깨어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난 내가 살고 있는 삶을 던지고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욕망이 있겠지.

그저 애써 그런 욕망을 무시하면서 살아가거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지금 현재에 만족하는 건강한 삶을 살거나.



L아파트 2단지 xx동 xx호

처음 장소에 대한 공지를 받았을 때 놀랬다.


‘이런 곳에서 콘서트를 한다고?’


지인에게서 개인이 주최하는 하우스콘서트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주소지가 아파트다.

아파트에서 콘서트를 한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 아파트 규모에서 작은 콘서트겠지.

하지만, 도착해서 본 공간은 아파트긴 했지만 동시에 꽤 잘 갖춰진 무대이기도 했다.


거실에 놓여진 가장 고가의 피아노부터 스피커 음향장치등 모든 것이 신선했다.

연주자들은 유럽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실력파들이 유학한 학교들의 출신이었다.

이런 분들의 연주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황홀한 경험이었다.

유럽의 다큐나 그 이외의 영상에서나 봤던 하우스콘서트를 부산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니.

거실을 가득 채우는 악기의 선율은 흘러넘치는 감동으로 내 귀에 닿았으며 빈틈없는 앙상블 연주는 온몸을 충만하게 채우는 의식과도 같이 한음 한음을 피부 속으로 밀어 넣는 듯했다.


연주가 끝나고 담소를 나누면서 이 모든 과정을 호스트가 기획하고 비용도 지불한다는 것을 알았다.

연주자를 초대하여 공연비를 지불하고 그 후에 참가자들과 함께 하는 식사까지 온전히 호스트가 부담하였다. 한편으로는 음악에 대한 그 열정이 너무나도 대단하게 느껴졌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째서 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연주자를 불러서 함께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인맥과 부를 가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두아르마네, 폴리베르제르의 바, 1882


계급통이 찾아왔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계급의 괴리감이 나의 뇌를 쥐어짜기 시작이라도 한 듯이 머리가 아파왔다.


“사람은 계급 속에서 태어난다.” 마르크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접했던 클래식과 내가 접했던 클래식은 너무나도 달랐을 것이다.


누나는 어머니가 비싼 돈을 지불하고 그래도 당신의 아이들이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구매하신 클래식전집 테이프를 늘어날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누나가 들을 때마다 귀동냥하듯이 듣다 보니 나 역시 클래식에 제법 익숙해졌다.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클래식이 수록되어 있던 테이프는 바흐부터 슈베르트까지 그 당시 아주 기본 중의 기본이 되었던 음악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 같은 음악가들의 곡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계급은 물리적 차별도 가져오지만 생각의 차별도 가져온다.

나는 직접 보기 전까지 하우스콘서트를 상상조차 못 했다.

집에서 하는 클래식공연이 그래봤자 피아노 음악에 맞춰 바이올린 정도 맞추는 가정 내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공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고의 연주자들이 협연하여 호프마스터, 드비엔느의 플루트 바이올린 앙상블, 마지막으로는 끌로드보링의 아일랜드여인까지 들으니 나의 인식은 결국 태생적 계급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가진 자들은 500g에 18만 원 하는 값비싼 커피도 한잔으로 소비하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다.


격차의 경험은 해머로 휘두르듯 타격감으로 다가왔다.

나의 하루가 너무나도 지루하게 느껴졌다. 어떤 이는 자신의 취미를 위해 전국에서 유명한 연주자들을 초빙하는 열정과 여유를 가졌는데, 나는 당장 먹을 점심에 가성비를 따진다.

사르트르가 삶은 B(탄생)와 D(죽음) 사이의 C(선택)의 과정이라고 했지만, 선택의 폭과 다양한 옵션은 결국 태어나는 구조에서 결정됨을 느낀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으며 두오모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누군가는 ‘돈을 모아서 여행 가면 되지’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고막에 닿기도 전에 나는 이미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이미 하겠지.

식견의 폭은 책 안에서만 발버둥 칠 뿐이다. 책을 통해서 미천한 경험의 폭을 줄여보려고 하지만 역시 사고방식에서부터 보법이 다름은 숨겨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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