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대한 아주 사적인 단상
조르주페렉의 <공간의 종류>를 읽다가 문득 내 방의 벽을 봤다.
특정한 패턴이 없는 잔주름의 텍스처가 들어간 옅은 아이보리 색의 벽지.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나의 집이 아닌지라 벽 위로 못질 하나 하지 않은 깔끔한 벽.
휑하게 비어 있는 벽이 부끄러울까
책장이나 책상, 옷장과 같은 가구로 벽의 대부분을 가린다.
누군가 놀러 오면 그림 하나 액자 하나 걸려있지 않은 벽을 나는 “동양적 여백의 미(美)는 바로 이런 것이지” 하고 우리 집 벽을 소개해 줄 것이다.
벽은 소개받은 적이 있을까.
고급 아파트나 고급 주택들은 아마도 부동산 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소개받을 것이다.
“이 아파트의 벽은 이탈리아제 고급 제지 원단을 사용한 것으로 소유하신 그림을 거시기에 충분히 잘 어울릴 것입니다.”
혹은 “가족사진을 위한 액자, 결혼사진을 거시기에 너무 좋은 공간이지요.” 라거나.
벽이 없었다면 그림이나 액자는 있었을까.
소소한 의식의 흐름은 알타미라 동굴벽화로 이어진다.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진 동물 그림은 아마도 주술적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그림은 그와 같이 벽이 있기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땅바닥에 그려진 나스카 지상화를 말하며 벽이 아니더라도 땅에 그렸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난 그 역시 벽에 그림을 그리던 어떤 시간 많은 사람들이 더 거대하게 그리기 위해서 땅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동네 담벼락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누구랑 누구는 뽀뽀했대요 등의 얼레리 꼴레리류의 낙서들. 빨간색 페인트로 적어 상대를 위협하려는 개조심 그림 및 문구, 건물주는 낙서라고 말하지만 작가(?)는 예술이라고 말하는 그라피티. 이 모든 그림들은 결국 벽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벽을 숭배하는 것 같다.
깨끗함 그 순수함을 찬미하며 그림 혹은 액자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기 싫다.
물론, 내가 빌린 집 벽에 감히 못질을 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 것도 맞다.
타공 없이 설치 가능한 벽걸이들이 현대사회에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나는 그조차 벽을 훼손하게 될까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공간의 기능면으로서 벽의 순수성을 인정할 뿐.
소음, 바람, 타 생명체 등 외부로부터의 단절. 그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닌가.
때로는 침대 위에서 책을 읽기 위한 훌륭한 등받이.
하루동안 피로했던 다리를 누워서 기댈 수 있는 그루터기로 충분한데
어찌하여 벽을 꾸미려 하는가.
떠올려보면 어린 시절 내 방 벽에는 영화 <미션>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가브리엘오보에가 너무 좋아서 보지도 않은 영화의 포스터를 걸었다.
쏟아지는 폭포수 옆으로 두 남자가 밧줄에 매달려 있던 장면이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내 방 벽의 색상 혹은 벽지의 질감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뭔가 웅장하고 폼나던 그 포스터는 기억이 난다.
그렇게 생각하면 벽은 인식하기 전에 인지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벽은 실제 하는 물질이기도 하지만 언어가 사회를 구분하듯 벽은 공간을 구분하는 개념은 아닐까.
그래서 인식하기 이전에는 공기 중의 산소가 있다는 것을 모르듯 그저 그렇게 느끼고 사는 것은 아닌지.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벽을 보게 된다. 왼쪽 면에 묻어있는 검은 흔적은 무엇에 의한 것일까.
전혀 모르겠다. 심지어 저 흔적이 있었다는 것을 방금 알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