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국보에 대한 아주 사적인 감상

by 우물

영화 <국보>는 선형적인 시간의 캔버스 위에 섬세하게 그려진 거대한 그림 한 폭을 보는 듯한 작품이었다.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된 족자 그림처럼 느리게 펼쳐지고, 관객은 그 천천한 흐름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 유학 시절이 있었음에도, 나는 가부키를 한 번도 보러 간 적이 없다.
샤미센의 날카롭고 또 어딘가 늘어지는 선율, 온나가타의 찢어지는 목소리, 예스럽고 번잡해 보이기까지 한 말투들, 하얗게 칠한 분장의 이질감.
모든 것이 나에게는 ‘지루함’과 ‘과거의 유물’로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그것은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지는 어색함을 낳고, 어색함은 근거 없는 반감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반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상을 스스로 평가절하한다.
나는 가부키를 통해 그 오래된 감각의 층위를 이해할 준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는 가부키가 단순한 전통극이 아니라 시간을 다루는 예술임을 천천히 보여준다.
가부키의 움직임은 춤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절제되어 있고, 연기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형식적이다.
그러나 그 애매한 경계가 바로 가부키의 핵심이다.
움직임과 정지, 호흡과 시선, 순간의 무게가 합쳐져 감정을 완성한다.

특히 온나가타는 남성이 여성의 몸짓과 감정을 연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단순한 ‘역할’을 넘어 일본 전통이 추구해 온 ‘유겐(幽玄)’, 즉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깊은 곳에서 출렁이는 은근한 아름다움을 체현한다.
영화 속 온나가타의 몸짓은 단순한 여성 모방이 아니라, 여성성이라는 추상적 감정의 구현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가부키라는 전통 예술을 ‘심미적 철학의 총합’처럼 다루기 시작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는 일본 문화에서 퇴폐적 우아함과 고전 전통으로의 회귀가 동시에 나타나던 시기였다.
과거의 미(美)를 찬미하며, 밝고 직선적인 감정보다
우울함, 절제, 사라져 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던 시대.

이 시기 예술의 정서에는 와비(侘び)·사비(寂び)·유겐(幽玄) 같은 오래된 미학 개념이 다시금 강조되었고, 영화 <국보>는 이 정서 위에 놓여 있다.
특히 가부키라는 예술 자체가 이미 ‘사라져 가는 것을 붙드는 미학’이기 때문에
70년대 일본의 심미주의 기류와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한마디로,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고, 너무 슬퍼서 아름다운 미학
그 정서가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다.



영화는 하나이 가문을 통해 '핏줄'과 '재능'이라는 오랜 질문을 탐구한다.
하나이 한지로는 재능을 선택한다.
하지만 사회는 핏줄을 선택한다.

키쿠오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는 결국 ‘혈통이 아닌 자’.
이 차별은 은근한 시선의 형태로, 혹은 노골적인 감정의 배제로 나타난다.
그에게 내려진 예명 ‘하나이 토이치로’가 담고 있는 ‘동쪽에서 최고’라는 상징은 오히려 더 큰 부담과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감독이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이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정체성으로는 일본인이지만, 핏줄로는 일본인이 아니라 규정되는 존재.
재능과 노력으로도 넘을 수 없는 ‘핏줄의 벽’.
이 영화가 이 지점을 이렇게 정교하게 다루는 것은 감독 자신의 정체성 고민이 예술 속에 담긴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슌스케였다.
어릴 때부터 ‘당연히’ 3대 당주가 될 것이라 여겨졌던 인물.
하지만 그 당연함은 그의 인생에서 축복이 아니라 족쇄였다.

슌스케는 가부키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의무였고,
의무는 곧 비교가 되었다.
그는 키쿠오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시기하면서도 이해하려 한다.
그 복잡한 감정의 층위가 관객에게 현대 사회의 능력주의가 가진 모순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능력주의를 옳다고 말하지만,
막상 능력이 핏줄을 넘어설 때는 전통을 훼손한다고 느낀다.
슌스케는 바로 이 모순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결국 그 핏줄은 당뇨라는 치명적 저주로 돌아와 오히려 그 핏줄을 소유하지 않은 키쿠오에게 외려 안정감을 주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에서 슌스케는 소네자키가 되어 당뇨로 잘라낸 다리를 가지고 오히려 키쿠오를 넘어서는 듯한 무대를 보여주고 가부키 배우로서의 완결과 죽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의 분위기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이 죽음을 동경하는 듯한 일본적 정서에 있다고 본다.
일본 전통 예술은 오래전부터 ‘완성은 소멸의 직전에서든다’는 미학을 갖고 있었다.
꽃은 만개한 순간이 아니라, 지기 직전의 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인간의 삶도 끝을 향해 갈수록 더욱 깊어진다고 여기는 세계관이다. 특히 소네자키극은 미시마 유키오가 <우국>을 통해 그리려고 했던 일본의 아름다움과 맞닿아있다고 생각된다.

벚꽃이 흩날리는 극의 연출 역시 빠르게 지는 벚꽃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짧은 생을 의미하고 가부키의 동작 역시 ‘사라져 가는 느낌’을 예술화한 것이다.
움직임과 정지의 경계, 느린 호흡, 절제된 감정 표현은 모두
유한성과 덧없음을 인식하는 일본 문화의 죽음 미학에서 비롯된다.

굳이 말하자면, 한국 문화는 오랫동안 삶을 버티고 지키려는 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의지의 미학’을 강조한다.
전통 서사 속에서도 주인공은 끊임없이 싸우고, 버티고, 다시 일어선다. 소멸의 아름다움보다는 생존의 의지, 끈질긴 활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영화 안에서 키쿠오가 보여주는 투쟁과 슌스케가 보여주는 체념은 이 두 문화의 차이가 대비되는 지점처럼 보이도록 감독이 의도한 것은 아닐까.
키쿠오의 투쟁적인 삶은 한국적 생명력에 가깝고, 슌스케의 흔들림은 일본 문화 특유의 허무와 아름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하다.

영화 <국보>는 가부키라는 전통 예술, 핏줄과 재능, 70년대 일본의 심미주의, 그리고 일본 특유의 문화적 세계관까지 여러 층위가 겹겹이 얹혀 있는 영화로 해석되었다.

겉으로는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 신분, 전통, 예술, 민족, 생과 사에 대한 질문이 끝없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 질문들은 결국 나에게 돌아와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핏줄인가, 재능인가?
사라지는 것인가, 살아남는 것인가?

수리부엉이의 상징, 야쿠자의 아들로 태어나 야쿠샤로 살아간 주인공의 삶. 초반 눈이 흩날리는 새해에 죽은 아버지를 봤을 때의 풍경과 숨겨놓은 딸이 아버지의 극을 보며 새해 같았다는 말의 의미 등등

풀고 싶은 장면장면, 장치들이 많아 보는 내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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