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

파베우와 이지도르의 삶에 대한 아주 단편적인 감상

by 우물

파베우의 세계는 견고한 벽돌로 쌓아 올린 성과 같다.
미하우와 함께 지은 그의 집과 같이 말이다.
늘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격증을 따고 공부하고, 전후에는 당에 가입하여 인맥을 넓히고 권력에 줄을 선다. 그는 세상이 요구하는 모든 질문에 ‘정답’을 적어내려 애썼던 사람이다. 목표를 세우고, 야망을 태우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증명해 내는 삶.
파베우에게 삶의 의미란 곧 ‘쓸모’였고, 성취의 크기가 곧 존재의 무게였다.

그러나 소설의 끝자락에서 파베우의 손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어쩔 수가 없다>의 유만수가 마주했던 것처럼, 혹은 태고의 모든 인간이 결국 마주해야 했던 것처럼, 그토록 공들여 쌓은 성취의 탑은 시간이라는 바람 앞에서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미시아가 떠나고 자식들도 떠나고 홀로 있는 파베우는 오래된 블랙커런트 절임처럼 냄새나고 먼지가 뒤덮여있다. 파베우의 삶은 그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태고의 다른 사람들보다 성공했으나 그 성공의 끝이 텅 비어 있음을 보여준다.
인생의 ‘정답’이라 믿으며 달려가는 그 길 끝에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짙은 허무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음을 파베우의 삶으로 작가는 말한다.

반면, 이지도르는 다락방의 어둠 속에 앉아 그 모든 덧없음을 응시한다.
창이라는 경계를 통해 자신의 세상과 태고의 세상을 관찰한다.
세상의 기준에서 그는 쓸모없는 존재, 실패한 낙오자, 혹은 ‘바보’였다.
하지만 그는 파베우가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던 삶의 ‘의미’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진실’을 보려 했다.
의미가 인간이 만들어낸 위안이라면, 진실은 신이 숨겨둔 날것 그대로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서 보았던 그 아이가 떠오른다.
흙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곤충의 날개를 뜯고 짓누르던, 순수해서 더 잔혹했던 그 아이의 눈빛.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 불렀고 그의 행동을 단순한 폭력이라 여겼지만, 어쩌면 그 아이는 생과 사가 교차하는 가장 원초적인 지점을 아무런 필터 없이 만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지도르가 마을 사람들에게 낯섬을 주었던 이유도 그 때문일 테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포장해 둔 세상의 이면, 그 적나라한 영적 진실을 그가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파베우의 가면을 쓴 채 이지도르의 눈을 동경하는 모순의 역사였다.
나는 파베우처럼 살았다.
공부하고, 유학하고, 취업하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특별한 삶’의 궤적을 그리는 것이 내 존재를 증명하는 길이라 믿었다. 파베우가 걸었던 그 단단한 길을 걸으면 내 안의 갈증도 해소될 것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학위가 쌓이고 직함이 생겨도, 내면 깊은 곳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파베우의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내 영혼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내면은 언제나 이지도르의 다락방에 앉아 있었다. ‘성공’이 아니라 ‘본질’을, ‘사회적 규칙’이 아니라 ‘삶의 숨결’을 찾고 싶어 했다.

결국 파베우의 삶이 가르쳐준 것은 ‘성취로 삶을 구원할 수 없다’는 뼈아픈 진실이었다.
삶은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이 세계에 놓인 거대한 패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지도르는 비록 세상에 섞이지 못했고, 미시아와 루타의 사랑을 갈구하며 아파했으나, 적어도 그는 기만 속에 살지는 않았다. 파베우가 쌓아 올린 허상의 탑보다는, 차라리 고통스럽더라도 생의 진실을 맨몸으로 마주했던 이지도르의 삶이 내게 더 깊은 울림으로 남는 이유다.

세상이 말하는 쓸모와 의미의 강박에서 벗어나, 이지도르처럼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싶다.
비록 그것이 영원히 풀리지 않을 퍼즐이라 할지라도, 언어의 조각을 맞추고 그 행간에 숨은 삶의 뜻을 더듬어가는 것. 어쩌면 그것만이 허무한 생을 견디게 하는 유일하고도 진실한 위로일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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