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신이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닐까?”
어젯밤 친구가 내게 던진 이 질문이 오랫동안 마음속을 맴돌았다.
성경은 인간이 신의 권능에 닿고자 쌓아 올린 바벨탑을 보고, 신이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온 지면에 흩뜨렸다고 기록한다.
이때 아마도 신이 무너뜨린 것은 단단한 벽돌의 탑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은 인간이 공유하던 ‘이해’의 체계를 파괴했다.
인간은 이해를 통해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마 신을 찾지 않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신은 그렇게 바벨탑을 무너뜨렸고, 인간은 언어를 통해 실제 사물의 본질을 한정 짓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인간을 영원한 해석의 미로 속에 가두어버렸다.
이탈로 칼비노가 묘사한 도시 히파티아에서 여행자를 기다리는 것은 낯선 외국어가 아니다.
그곳의 변화는 말이 아니라 사물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굳게 믿어온 ‘기호’들이 사실은 얼마나 연약한 약속 위에 서 있는지를 히파티아는 기호와 상반되는 언어들로 웅변한다.
“기호들이 언어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언어가 아니오.”
히파티아의 철학자가 던지는 말은, 결국 우리가 사물에 입혀둔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선언과도 같다.
어느 날 TV에서 본 ‘교도소 레스토랑’의 풍경은 히파티아의 현대적 변주였다.
죄수를 가두기 위해 세워진 차가운 철창 안에서 사람들은 다정하게 마주 앉아 식사를 즐긴다. 교도관의 제복을 입은 이들이 음식을 나르고, 참회와 고립의 흔적은 낭만적인 배경으로 치환된다. 그 낯선 풍경 속에서 내 안의 ‘감옥’이라는 단어는 찢겨 나가고 전혀 다른 의미의 조각들로 재조립되었다.
기호와 실제 사이의 필연적 괴리를 이토록 선명하게 목격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우리가 ‘나무’라고 발음할 때, 그 짧은 음절은 결코 살아 숨 쉬는 나무의 거친 껍질이나 엽록소의 비릿한 냄새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언어는 대상을 복제하는 거울이 아니라, 세상을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크기로 가공하고 왜곡하여 쳐놓은 그물망에 불과하다.
결국 모든 언어는 진실을 비추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견뎌내기 위해, 혹은 신이 만든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원한 ‘속임수’ 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고개를 든다.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여행한 도시들을 설명할 때,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이미 기억과 상상력에 의해 정교하게 ‘조작’된 결과물이다.
사실의 순수함은 과거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칸에게 전달되는 것은 오직 언어라는 필터를 거친 ‘우아한 속임수’뿐이다.
“속임수 없는 언어는 없다.”
이 문장이 가슴 깊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언어라는 창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지만, 그 창을 여는 순간 우리는 대상의 본질로부터 한 걸음 멀어지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 신은 어쩌면 인간이 진실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이 우아한 가림막을 씌워둔 것일지도 모른다.
‘나’와 ‘너’라는 단어는 언뜻 대칭적이고 평등해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깊은 분절의 씨앗이 심겨 있다. ‘나’를 정의하기 위해 ‘너’를 타자화하고 구별 짓는 순간, 언어는 차별의 근거가 된다.
이름을 붙이고 범주를 나누는 언어의 속성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기보다는 서로의 경계를 확인하게 만드는 서글픈 도구가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벨의 탑이 무너진 뒤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가혹한 저주인지 모른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이러한 언어의 부조리 속에서 ‘지평의 융합’을 말한다.
그는 이해란 타자의 세계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평과 타자의 지평이 만나 서로를 확장하며 새로운 공통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언어가 가진 속임수와 한계를 인정하되, 그 불완전한 도구를 매개로 서로의 세계가 겹쳐지는 찰나를 신뢰하는 것이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유나가 가후쿠에게 수화로 건네던 위로의 순간은 가다머의 철학이 가닿는 가장 아름다운 종착지였다. 음성 언어가 가진 교묘한 위선과 조작을 걷어내고, 공기를 가르는 손짓과 진실한 눈빛만으로 치유를 말하던 유나의 모습.
거기엔 '나'와 '너'를 가르는 날카로운 단어도, 대상을 왜곡하는 기호의 속임수도 없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혹은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음에도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언어라는 속임수 너머에 존재하는 서로의 진실한 고통과 외로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차별을 넘어서는 진정한 소통은 정교한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지평을 허물어 상대의 풍경을 받아들이는 용기에 있다.
어쩌면, 신의 저주를 푸는 열쇠는 결국 말이 멈춘 곳에서 시작되는, 너와 내가 사랑하는 그 순간에 있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