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후기] 가여운 것들

순수함의 폭력

by 우물

불편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동안,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물감에 시달려야 했다.
적어도 벨라가 리스본을 지나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하기 전까지, 화면 속의 아름다운 프랑켄슈타인은 내게 내내 불편한 존재였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아마도 그녀가 가진 '이질적인 순수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순수함을 아름답다고 칭송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순수함 속에 내포된 폭력성이 사회라는 틀에 의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린아이가 휘두르는 서툰 주먹은 쉽게 제어할 수 있기에 귀엽게 보아 넘길 수 있지만, 어른의 육체를 빌린 아기의 폭력성은 전혀 다른 문제다.
벨라의 순수함은 노골적인 무지에서 기인한 폭력이었다.
시체의 눈을 망설임 없이 칼로 난자하고,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쾌락에 탐닉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 안의 '주입된 상식'이라는 세계를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통제되지 않는 무법자의 난봉, 그것이 내가 마주한 벨라의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벨라가 던컨과 함께 리스본으로 향하는 순간
흑백의 세계는 찬란한 색을 입으며 반전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색채는 경주에서 마주했던
윌리엄 터너의 바다와 하늘처럼 몽환적인 환상을 더했고,
구속되어 있던 벨라의 감각들이 비로소 해방되었음을 선언하는 듯했다.
미숙한 순수함은 역설적으로 상류 사회의 따분함과 던컨으로 대표되는 남성적 오만함을 비틀어버린다. 리스본에서 그녀는 '맛, 소리, 섹스'라는 원초적 감각에 눈을 뜨며 자신만의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리스로 떠나는 배 위에서부터 벨라의 여행은 더 깊고 철학적인 사유로 진입한다.
던컨과의 감각적 쾌락은 더 이상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냉소주의자 해리와 노년의 마사를 만나며 그녀는 '나'라는 개인을 넘어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던컨이 그녀의 책을 바다로 집어던지는 장면에서 나는 헨리 입센의 <인형의 집>을 떠올렸다.
여성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성의 옹졸함이 폭로되는 순간, 영화 내내 나를 괴롭히던 이물감이 조금씩 사라졌다.
​알렉산드리아의 고탑 위에서 굶주린 빈민가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벨라가 느낀 고통과 연민.
그 지점에서 비로소 벨라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균형이 맞물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적 아픔에 공감하는 순간, 벨라는 더 이상 기괴한 피조물이 아닌
한 명의 고귀한 주체로 다가왔다.


영화는 벨라라는 캐릭터에 실로 방대한 함의를 담아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인 '빅토리아'는 억압된 시대를 살아간 여성의 투쟁을 상징하는 동시에,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깨어나는 근대 유럽 사회의 초상이기도 하다. 나아가 데이터(경험)를 통해 자아를 형성해 가는 오늘날의 인공지능(AI)과 그 창조주들의 인식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갓윈으로 상징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부활의 은유,
오비디우스의 <변신>을 떠올리게 하는 키메라 동물들,
그리고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뇌인가 육체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까지.
이 영화는 마치 거대한 사유의 실험실 같았다.

결국 <가여운 것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하다 잊혀가는 과정을 지나, 원초적 본능에 머물던 한 존재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유하는 지성'으로 성장해 가는 숭고한 기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자신의 정원에서 평온하게 책을 읽는 벨라를 보며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에게 '가여운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오롯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가여운 것들은 그녀를 구속하려 했던 억압적인 남성들로 남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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