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와 욕망

사랑의 다른 얼굴

by 우물

욕망이 멈추고 관조가 시작되는 순간, 그러니까 마음을 비우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 인간은 더 이상 유익한지 위험한지, 흥미로운지 지루한지. 다정한지 거친 지, 강한지 약한지에 따라 판단되지 않는다. 사물도 그러하지만, 인간도 순수한 관조의 자세로 바라보면 자연이 되고, 아름다워지고, 독특해진다.
관조는 연구나 비판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 -

헤르만 헤세는 욕망이 멈추는 곳에서 비로소 '관조'가 시작되며, 그 투명한 시선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의 문장을 곱씹을수록 반문이 차오른다. 과연 욕망이 거세된 시선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히려 인간이기에,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관조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헤세가 말한 관조의 평안함은 분명 매혹적이다.
대상을 이해관계나 쓸모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일은 마음의 파도를 잠재운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대상과 나 사이에 안전한 '거리'가 확보되었을 때만 허락되는 특권이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기 시작하는 순간, 그 안전한 거리는 무너지고 시선에는 필연적으로 욕망의 온기가 서린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아끼게 될 때, 인간은 결코 그를 피어 있는 꽃처럼 바라만 볼 수 없다.
그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고, 그의 내면을 분석하고 싶어 하며, 종국에는 그의 세계 속에 머물고 싶다는 소유의 갈망을 품는다.
관조가 연구나 비판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라는 헤세의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이 들어가기 때문에 관조가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약한 존재의 본질이다.

영화 <가여운 것들>의 벨라를 떠올려 본다.
그녀가 여러 남성과 무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 시선 안에 사랑도 욕망도 부재했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결핍도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관조하듯 그 순간들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에 '연민'이라는 사랑의 조각이 스며들었을 때, 그녀의 관조는 깨어졌다. 빈민가의 비참함을 목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려 했던 행동은 더 이상 순수한 관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였고, 타인의 고통을 나의 결핍으로 치환하는 강렬한 감정의 동요, 즉 '욕망'의 시작이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 il bacio


사랑은 우리를 관조의 평원 아래로 끌어내려 욕망의 흙탕물 속으로 던져 넣는다.
누군가는 상대를 통해 위로받고 싶은 욕망을, 누군가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갈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천한다.
욕망의 근원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이 우리를 끊임없이 무언가 갈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랑이 관조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상의 아름다움을 박제된 풍경처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도록 허용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관조하는 시선은 안전하지만 차갑고, 욕망하는 시선은 위태롭지만 뜨겁다.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름다운 욕망. 상대를 더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호기심.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오해와 상처들.
이 모든 번뇌는 사실 우리가 상대를 얼마나 간절하게 여기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고귀한 지표다.

평온한 관조 대신 아픈 욕망을 택하는 것, 나를 잃어버릴지 모르는 두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누군가의 손을 잡으려 애쓰는 인간의 모습은 그 자체로 눈부시다.
욕망이 멈추고 관조가 시작되는 순간 세상은 정갈해질지 모르지만, 욕망이 시작되고 관조가 멈추는 순간 비로소 인간의 진짜 삶이 시작된다. 사랑은 관조를 포기한 그 뜨거운 심장 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인간적인 꽃이다.
그래서 사람의 약함이 타인을 사랑하는데서 비로소 치유가 될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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