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로 부터 기대라는 이름의 '사명'을 부여받는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눈동자 속에서 세상 무엇보다 특별한 존재여야만 했고, 그 기대는 다정한 속삭임이 되어 돌아와 우리의 눈동자에 박힌다.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자존감 회복의 물결은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성배를 쥐여주었다.
"당신은 특별하다. 당신의 삶에는 반드시 고결한 이유가 있다."
그 이전의 시간들, 아이가 그저 한 가문의 대를 잇는 그림자이거나 생존의 도구였던 시절엔 '나의 특별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시대의 형벌을 살고 있다.
내가 이 땅에 발을 디딘 이유, 너를 만난 이유, 오늘 아침 창가를 비춘 햇살이 유독 찬란했던 이유까지.
우리는 모든 현상 위에 '의미'라는 깃발을 꽂아야만 비로소 안심한다.
새해 첫날, 지평선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것은 태양의 에너지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묵묵히 떠오르는 거대한 항성의 궤적 위에, 우리가 각자의 소망과 의미를 덧입혔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불꽃으로, 누군가에게는 참회의 눈물로 작동하는 그 에너지는 사실 해석하는 자의 마음이 지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우연을 운명으로 박제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손길이다.
'세렌디피티'라는 근사한 이름 뒤에 숨겨진 진실은 의외로 담백하다.
수만 번의 엇갈림 속에서 우연히 내가 끼워둔 징표를 들고 있는 누군가를 마주쳤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이름짓고 거대한 사명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수많은 우연이 빚어낸 마법 같은 순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토마시가 테레자를 만나기 위해 거쳤던 일곱가지 우연처럼, 그 우연에 '운명'이라는 숨결을 불어넣어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간절한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사랑한다. "그저 그렇게 되었다."
때로는 어떤 일에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 더 아름답다.
바람이 불어 잎새가 떨어지는 것에 비장한 각오가 없듯,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파도와 노을에도 거창한 이유가 없을 수 있다.
'의미'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저 현상 그 자체를 정직하게 응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의미를 찾아 헤매던 고단한 눈을 감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생의 결을 따라가 본다.
이유 없이 피어난 꽃이 이유 없이 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무수한 '그냥'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제야 우리는 팽팽하게 당겨진 의미의 밧줄을 놓고, 비로소 고요한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바다에 몸을 눕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