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전제는 불확실성이다.
확실성이 정태적이고 안정적인 안온함을 제공한다면, 불확실성은 예기치 못한 경이와 뜻밖의 즐거움을 내포한다.
점심시간 일식집의 카운터석에서, 중고 거래를 위해 미리 도착해 누군가를 기다리며, 혹은 상행선 KTX 열차의 옆자리에 앉을 타인을 마주하며 우리는 지극히 세속적이고도 순수한 상상에 빠져들곤 한다.
일상의 많은 영역에서 불확실성은 생기를 잠식하는 불안의 요소로 작용하지만, 타자와의 조우에 있어서만큼은 그것이 곧 생의 동력인 '설렘'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원치 않는 주선이나 불편한 소개팅의 자리일지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냉소적인 태도로 무관심을 가장하며 앉아 있는 그 순간조차, 인간은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격정적 감정의 파고에 휩싸이기를 갈망한다.
이러한 갈망은 우연을 '운명'이라는 신비의 영역으로 격상시킨다.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 길을 걸어왔다."
'운명'이라는 언어가 부여하는 무게감은 지극히 평범했던 마주침을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 사건으로 변모시킨다. 사피어-워프(Sapir-Whorf)의 가설이 시사하듯,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며 기억을 재조립한다.
만남을 운명이라는 범주로 규정하는 순간,
찰나의 선율과 착장, 은은하게 감돌던 향기는 하나의 성물이 되어 생의 역사 속에 박제된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것에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생각하고 고립을 자처한다. MBTI라는 그림자에 스스로를 숨기고 내성적이라는 말을 마치 아테네의 방패처럼 사용한다.
물론, 개인의 차는 있을 수 있지만 홀로 마주하는 반복적인 일상이 만남의 실패보다 더욱 지독한 권태를 불러올 때가 있다. 만남의 실패가 가져올 여파에 시작 전부터 피로함을 느끼고 혼자 있음을 독려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만남에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그가 구축해 온 세계의 단면을 엿보는 행위 자체는 결코 무가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홀로 있다고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홀로 있지 않다.
누군가가 만든 콘텐츠와 대화하고 책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덧입히는 행동은 결국 타인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선택적인 옵션에서 차이가 있을 뿐.
타인과의 만남에서 느끼는 실망감은 단지 각자의 기대치가 교차하지 못한 지점이었을 뿐, 실패라는 낙인을 찍을 대상이 아니다.
고독에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고독을 통해 삶을 사유하는 것은 좋지만, 결국 고독은 외로움을 낳게 되고 오래된 외로움은 우울함을 피워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에게 피로를 느끼면 혼자 있고 싶었고, 사람을 만나서 에너지를 쓰기보다, 혼자 책을 읽고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는 것이 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그리는 삶의 그림이 동일한 색으로만 채워짐을 느꼈다. 결국 내가 너를 만나는 행위는 삶을 다양한 색으로 채우는 일이지 않을까. 사람은 사람을 통해 치유되며, 모든 관계의 확장성은 '기대함'에서 비롯된다.
분명 기대는 실망감을 가져온다. 하지만, 우리가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를 읽으며 즐거워했던 이유는 동화 속 판타지 같은 운명적인 만남을 소망하는 것이, 꿈꾸지 않는 건조하고 냉소적인 삶보다 훨씬 역동적이며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