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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Apr 22. 2018

영화 <사랑을 부르는 파리> 보면서 파리 일주

2008년에 제작된 세드릭 클래피쉬 감독의 프랑스 영화. 130분.

출연 : 줄리엣 비노쉬, 로망 뒤리스, 파브리스 루치니, 알버트 듀퐁텔 등


물랑루즈에서 메인댄서로 일하는 피에르(로메인 듀리스)는 누나와 세 아이와 함께 샹젤리제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파리의 아파트에 함께 살고 있다. 언젠가 심장병으로 자신이 죽을 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는 우연히 베란다에서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 래티시아(멜라니 로랜)를 지켜보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젊은 남자친구와 중년의 건축가 롤랭(패브리스 루치니)이 있다.
  한편, 엘리즈(줄리엣 비노쉬)는 메닐몽탕의 시장에서 야채가게를 하는 주인 장을 알게 되고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장의 친구 프랭키(길스 레로쉬)는 카페에서 일하는 캐롤린을 좋아하지만 터프하고 장난스러운 태도때문에 매번 그녀에게 상처만 준다. 파리는 사랑으로 넘쳐나고 파리의 겨울도 깊어갈 때 자유분방한 사랑을 쫓는 래티시아는 롤랭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는데…

피에르가 심장병 진단이 나오기 전에 춤을 추던 물랭루즈.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가 몽마르트, 그중에서도 물랭루즈다. 지하철역이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런지 늘 관광객들이 북적거리고 그들은 항상 이곳을 향해 사진기를 겨누고 있다. 그리고 공연시간이 되면 앞길에 길게 줄이 늘어선다. 
물랭 루즈는 1889년에 생긴 카바레다. 근데 이 카바레는 대뜸 춤바람이랑 연결되던(춤을 추는 게 죄악시되던 1960-1980년대에) 우리 카바레랑은 좀 다르다. 왜 다른지를 설명하려면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될 필요가 있다. 
1889년이라는 해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고 에펠탑을 보여주기 위한 만국박람회가 열린 해다(1900년에도 또 만국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린다). 이 10여년은 흔히 벨 에포크(Belle Epoque)라 불린다. 벨 에포크란 말 그대로 '살기좋은 시대'다. 평화롭고, 산업이 발전하고, 풍요한 문화가 꽃을 피워 낙관주의가 팽배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나간 시절. 말하자면 요순의 시대였던 셈이다.
그리고 몽마르트는 점점 더 거대해져가면서 고도시로서의 매력을 잃어가던 파리에서 유일하게 목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언덕이었다. 화가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일에 지친 파리지앵들이 주말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양떼가 뛰놀아 시골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으로 몰려와 편히 쉬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몽마르트 언덕에는 30개의 풍차방아가 있어서 곡식이나 옥수수, 석고(몽마르트는 거대한 석고 채굴장이었다. 말하자면 지금 몽마르트의 땅 속은 텅 비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곳을 찾는 분들은 항상 발밑을 조심하시길. 언제 어느때 꺼질지 모른다), 돌을 빻았다. 그러니 몽마르트의 풍경이 얼마나 낭만적이었겠는가. 그때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잔 걸치는 곳이 바로 카바레였다. 여기서 그들은 사회적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한데 어울려 대화하고 술마시고 춤추었다. 일종의 해방구였던 셈이다. 
이런 시대적, 사회적 분위기를 감지한 조제프 올레르(그는 이미 마들렌 성당 옆의 올림피아 극장도 갖고 있었다)는 1889년 그 당시 정원이던 지금의 장소에 물랭 루즈를 세웠다. 그리고 여기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프렌치캉캉춤이 생겨났다. 라 굴뤼나 제인 아브릴 같은 댄서들이 이름을 떨쳤고, 로트렉은 포스터를 그려 물랭루즈를 전 세계에 알렸다.


알리즈(쥘리에트 비노슈)가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하던 벨빌 공원.  파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파리 20구의 공원은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 중 하나다. 특히 꽃이 만발한 봄이 이 공원을 찾기에 좋은 계절이다.



지하철이 센 강을 건너는 다리 위로 지나가는 비르-아켐 다리.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말론 브란도가 절망의 외침을 내지르던 그곳.

이 다리의 2층으로 지하철 6호선이 다닌다. 이 다리는 영화나 광고를 자주 찍어서 유명해졌다. 
비르아켐은 리비아의 지명이다. 왜 리비아의 지명이 파리의 다리에 붙어졌냐고? 2차대전 당시 비르아켐 주변의 사막에서 영국군은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던 독일군 롬멜 장군의 전차부대 공격을 받아 궤멸되기 직전이었다. 그때 38개국의 병사로 구성된 외인부대가 영국군이 무사히 퇴각할 때까지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래서 그들을 기리기 위해 비르아켐이라는 이름을 이 다리에 붙인 것이다. 
저 다리 오른쪽에 비르아켐 역이 있고, 2차대전 당시 그 아래쪽에는 Velodrone d'Hiver라고 불리던 실내경륜장이 있었다. 13,000명의 유대인들(그중 3분의 1은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이 체포되어 이 경기장에 모여 있다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지금 이 경륜장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후일 프랑스 대통령이 이때의 강제수용에 사과하는 내용의 사과비가 서 있다.  



소르본 역사학 교수인 롤랭(파브리스 뤼치니)이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는 페르라세즈 묘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역시 파리가 내려다보인다. 특히 울긋불긋 단풍이 드는 가을이 이 묘지를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다.

파리의 공동묘지는 우리와는 달리 혐오시설이 아니다. 봄에는 온갖 종류의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키 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며 가을에는 알록달록 단풍이 지는 공원이다. 그래서 공동묘지에 가면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파리 시내에 여러 개의 공동묘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파리 북동쪽에 자리 잡은 페르라세즈 묘지인데(연 방문객 200만 명 이상), 가장 넓어서이기도 하고(44 ha) 프레데릭 쇼팽이나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오스카 와일드 등 우리가 잘 아는 유명인사들이 묻혀 있기도 해서다. 
1804년에 문을 연 이 묘지는 처음에는 파리에서 멀어 겨우 13구의 무덤밖에 없었지만,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몰리에르, 라퐁
텐 등 소위 유명인사(?)들의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지금은 약 7만 구의 무덤이 있다.



뤽상부르 공원을 걷고 있는 라에티아. 파리 시민들이 저렇게 모여 운동을 한다.



생루이 섬의 앙주 강안에 있는 란준 저택. 화려한 벽장식으로 유명하다.



롤랑의 동생인 건축가 필리프가 사는 아파트.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미테랑 국립도서관. 책을 펼쳐놓은 모양을 한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센 강 남부 알레지아에 입구가 있는 지하공동묘지. 롤랑은 여기서 TV 녹화를 하다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고 녹화를 중단한다. 원래 퐁피두센터 옆의 레알에 있던 공동묘지의 유골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뒤로 보이는 것이 미테랑 국립도서관.



룽기스 농수산물 도매시장. 원래 파리 시내의 레알 지역에 있던 농수산물 도매시장을 철거하고 파리 남쪽의 오를리 공항 근처로 옮겼다.



롤랭이 "지식의 대중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리를 소개해달라는 아르튀르의 제안을 거절하다가 출연료를 많이 준다고 하자 받아들였던 팔레 르와얄. ㅋ
루브르 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이 궁전은 사실 루이 13세의 수상인 리슐리외가 건축가인 작크 르메르시에에게 의뢰해서 지은 17세기 건물이다. 1781년에 재건축되면서 이 궁전의 정원 둘레(3면)에 사진에서 보는 아케이드가 덧붙여졌고, 이 아케이드에 카페들이 들어섰다. 이 카페들은 프랑스혁명을 일으킨 발원지가 되었다. 
정원과 궁전 사이의 중정에는 뷔렌의 기둥들이 서 있다. 궁전 건물은 현재 국무회의장과 헌법위원회, 문화부 건물로 쓰인다. 작가인 콜레트와 장 콕토가 여기서 살기도 했다. 
도심 속에 꼭꼭 숨어 있는 이 정원은 그 존재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루브르 박물관이나 비비엔 갤러리 등이 가까이 있고, 좋은 카페도 많아(좀 비싸기는 하지만) 휴식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센 강과 센 강 북쪽의 동네



무용수 피에르(로맹 뒤리스)의 아파트가 있는 파리 20구 강베타 광장. 그는 여기서 페르라세즈 묘지를 내려다보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소르본대학 학생인 라에티아를 사랑하여 삶에 대해 성찰하기도 한다.



피에르의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파리 시내.



몽마르트르의 사크레쾨르 성당 앞에 앉아 있는 라에티아와 남자친구. 흔히 목격되는 광경.

1. 사크레쾨르sacré coeur, 즉 성스러운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말한다. 그러니 한국말로 하면 성심성당. 
2. 1875년에 초석을 놓았고, 1919년에 축성되었으며, 공식적인 완공연도는 1919년이니, 44년이 걸렸다. 
3. 이 성당은 1870년에 일어난 보불전쟁과 그 다음 해 5월에 벌어진 파리 코뮌의 결과다. 
1870년 프랑스와 프러시아(지금의 독일)는 전쟁을 했다. 프랑스는 먼저 선전포고를 헀지만, 극심했던 군부의 부패로 완패했다. 그당시 프랑스를 다스리던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혔으니 두말하면 뭐하랴. 그러나 프랑스의 중심도시 파리는 성문을 잠그고 양심적인 정치인, 지식인들과 프롤레리타아들을 중심으로 프러시아군에 저항했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외세(프러시아)를 끌어들여 파리시민들을잔확하게 진압한다. 
그리고 이때 베르사유궁의 거울의 방에서 프러시아에 굴욕적으로 항복한 정부에 대해 쌓인 파리시민들의 분노는 그 다음 해 5월 파리코뮌이라는 시민저항운동으로 표출된다. 파리코뮌이 처음 시작된 곳이 바로 몽마르트르 꼭대기다. 제 2 제정이 멸망하고 들어선 제 2 공화국은 파리시민들이 프러시아군에 저항할 때 자기네 돈으로 산 대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사크레쾨르 성당이 없는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서 대포를 지키고 있던 정부군 소대는 이 명령을 거부하면서 5월 한달 동안 파리 시내를 휩쓴 부르주아와 프롤리타리아의 시가전이 발발했다. 
<체리꽃 피는 시절>이라는 혁명가(?)는 이때 만들어졌다. 5월 마지막 주일("피의 1주일"이;라고 부른다)에 페르라세즈 묘지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시민군은 결국 패배, 묘지 안에 있는 "시민군의 벽" 앞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4. 소위 지배계층이었던 프랑스의 가톨릭 고위층은 보불전쟁에서 프랑가 패한 게 프랑스 국민들의 신앙심이 약해졌기 때문이라 주장하며 이 성당을 세웠다. 그리고 그 다음 해 파리코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감히 자기들에게 들고 일어나자 화들짝 놀라 성당 아래의 공원에 루이즈 미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Louise Michel은 파리코뮌 때 여성들을 이끌고 직접 정부군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운 여장부다. 
프랑스 지배계급은 이 공원에 그녀의 이름을 붙이고 사크레쾨르 성당으로 위에서 짓누르는 것이다.
5. 사진 오른쪽의 동상은 생루이Saint Louis(1226-1270). 원래 이름은 루이 9세로, 프랑스 왕 중에서 유일한 성인이다. 유럽의 왕들을 설득하여 십자군운동을 갔다가 튀니지에서 순교한 사람이다. 이 성당 오른쪽에는 잔다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프랑스 가톨릭이 이 두 성인을 저렇게 성당 앞에 세워두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도 저 두 사람을 추종한다. 
6. 이 성당은 특이하게도 방향이 동서가 아닌 남북이다. 그리고 파리 근교의 채석장에서 캐낸 돌로 지어졌다. 순례 성당이라서 장례식이나 결혼식은 안 한다.



페르라세즈 묘지 정문



팡테옹 앞, 뤽상부르 공원 옆에 서 있는 라에티아



피에르가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 바스티유 광장.

뒤로 보이는 건물은 바스티유 극장. 



소르본 대학 앞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상념에 잠긴 피에르. 배경에 보이는 것은 페르라세즈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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