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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누가 보더라도 꼴랭임에 틀림이 없다. 우선 양적으로 따져봐도 가장 많이 등장하고, 질적인 측면에서 관대함이라든가 희생이라든가 하는 그의 성격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또한 그는 이 소설의 줄거리를 그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프로프(Propp)와 그레마스(Greimas)가 만들어 놓은 행위자 모델에 따르자면 꼴랭의 역할은 주체자(Sujet)이며, 그의 탐색(Quete)은 '최초의 결핍 상태'에서부터 시작된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아무런 걱정없이 살던 그가 식크의 연인 알리즈를 보는 순간 그의 정신적 결핍 상태가 시작된다. 프로프 식으로 말하자면 "주인공은 그의 정신적 균형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결핍 상태에서 비롯된 탐색은 다름아닌 사랑의 탐색이다. 그리고 그의 욕망이 추구하는 대상(objet)은 클로에다.
클로에는 대상의 좋은 예이다. 줄거리 전체가 꼴랭의 주체적 관점에서 이야기되고 체험되기 때문에 클로에는 객관적 세계의 한 계기로서 외부에서만 관찰될 뿐이다. 우리는 그녀의 내적 독백을 결코 듣지 못한다. 그녀의 세계관도 알 수가 없다. 그녀는 현전하가 이전에 이미 앨링턴의 노래 속에 "삽입되어 있었다." 하나의 음악적 창조물이며 디스크 속에 객체화되어 있는 그녀가 여성 객체로서의 자기 위치를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녀도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꼴랭을 유혹하기도 하는 등 주체자로서의 역할을 해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곧 객체화, 대상화되고 만다. 병이 든 뒤로 그녀는 온몸이 마비되고 마는 것이다. 말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그녀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시선뿐이다. 게다가 그녀의 시신이 들어 있는 궤는 관이 아닌 "검은 상자"로 불린다. 음반이라는 물체 그 자체였다가 검은 상자라는 물체 속에 갇히는 그녀에게는 삶의 여유가 없다. 배경을 이루는 사물화된 세계 속에서의 그녀는하나의 사물에 불과한 것이다.
클로에 그녀는 누구에 의해 꼴랭에게 제공되는가? 아무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제공한다. 프로프적 의미의 '발신자(destinateur)'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클로에는 마치 소용돌이치는 파도처럼 비너스처럼, 세월의 거품 속에서 생겨난 여자다.
<세월의 거품>이라는 작품에서 엄격한 의미의 부모들이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처녀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존재하지 않는다. 꼴랭에게도 가족은 없는 것 같다. 꼴랭과 클로에의 결혼식에서는 가족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보리스 비앙의 소설세계에서 축출된 부모 친척들은 세월의 거품이라는 무대를 해방된 청춘남녀들의 축제장으로 만든다. 비앙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부모들이 배제되어 있다는 분석은 중요한 시사를 던져준다.
꼴랭의 탐구에 있어서 '수신자(destinataire)'는 당연히 꼴랭-클로에의 결합이다. 완전히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식크와는 반대로 꼴랭은 클로에가 살아갈 수 있도록 헌신한다.
클로에가 죽음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꼴랭은 수련이라는 '적대자(opposant)'와 싸워야만 한다. 주인공이 완전무장한 거인이라든가 용과 싸워야 하는 민담에서와는 달리 클로에의 적대자는 그녀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 싸움은 더욱더 힘들고 절망적이다.
클로에의 가슴을 좀먹는 수련은 "암"의 비유적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 민담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인공에 의해서 해체되거나 소명되는 '적대자'가 본 작품에서는 끝까지 해체되지 않는다. 식물적인 '적대자' 수련은 저 혼자 움직이는 자율적인 존재이다(<세월의 거품>에서는 유생물/ 무생물의 구분이 대부분 위반되고 있다. 저 혼자서 움직이는 환약이라든가 돌연변이된 토끼 등 그 예는 많다.)
수련은 클로에를 먹고 살았지만 그녀가 죽었다고 해서 함께 죽지는 않았다. 그것은 물속 깊은 곳에 웅크린 채 수면으로 다시 떠오르기만을 기다린다. 해체되지 않는 적대자 대신 죽음을 기다리는 주체자,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비극성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보다 큰 비극은 더 깊은 곳에 잠복해 있다. 꼴랭과 클로에는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그 적대자(=악)를 정확하게 명명할 수만 있었던들 치유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수련은 단지 악의 은유에 불과했을 뿐이다. 클로에가 앓는 병은 하나의 징후에 불과하다. 그것은 보다 깊은 곳에 뿌리박고 살아있는 어떤 구조를 가리고 있는 표면의 허울좋은 꽃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징후는 은유적이다, 라고 라깡(Lacan)은 말하지 않았던가. 꼴랭과 클로에의 비극은 그들이 이 은유의 세계 속에서만 살았다는 데 있다.
'보조자(adjuvant)'는 여러 명이 등장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보조자는 니꼴라다. 재능 있는 요리사이며 능란한 운전사이며 영리한 춤꾼인 니꼴라는 부모들이 배제된 이 청년들의 세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내고 있다. 자연적 가족이 '선택적 가족' 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는 '입문자(Initiateur)' 역할도 동시에 해내 고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그 중요성을 강조했던 이 같은 유형의 등장인물은 많은 신화 이야기와 입문 의식에 등장한다. 입문자로서의 니꼴라는 꼴랭을 비롯한 젊은 등장인물들을 성인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니꼴라는 실제로는 하인 이상의 존재이다. 그는 오히려 주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 '보조자'가 '주체'를 능가하는 민담의 경우에서처럼 이 탁월한 보조자 니꼴라도 그의 주인의 주인인 것이다.
프로프에 따르면 보조자의 기본적 속성 가운데 하나가 주인공을 "또 다른 왕국"으로 보내는 일이다. 그 "또 다른 왕국"은 가치가 전도되는 적대자의 영역이다. 과연, 꼴랭의 운전사인 니꼴라는 이 젊은 신혼부부를 그 기묘한 지방으로 데려가고, 클로에는 여기서 병에 걸리게 된다. 지리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이 지방은 무엇보다도 수련의 영역이다. 또한 이 지방은 '비도시'이다. 그러므로 시골이나 산악지방인 이 비도시에서는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는 자연이 불안하게 증가하고 번식한다. 이 '비도시'는 습기에 가득 찬 유해한 장소이다.
탐색에 관한 이야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세월의 거품> 또한 두 장소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 장소는 또 다른 장소의 부정이다. 니꼴라는 이 두 장소를 늘 왕복하는 인물이다. 그는 신혼여행을 가는 자동차를 운전할 뿐 아니라 장례행렬을 뒤따라가기도 한다. 두 세계의 중재자인 그는 그러나 그 마술적 힘을 오래 간직하지는 못한다. 마치 동화에서처럼 결핍-충족(결혼)이라는 과정의 보조자 역할을 했던 그의 힘이 결혼식 이후에는 전혀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다. 공상적 이야기에 이어 비극적 이야기가 전개된다. 비극의 세계를 특징짓는 것, 그것은 보조자들의 무능력이다.
클로에가 병에 걸렸을 때 니꼴라는 마법 음료('강장제')를 만들지만 클로에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법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연금술사/마술사인 니꼴라의 시대는 가고 의사인 망즈망슈의 시대가 온 것이다.
회색 생쥐는 제2의 보조자이다. 니꼴라가 먹을 걸 주고 귀여워하는 생쥐는 열성적이지만 무기력한 보조자이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마술적 보조자인(생쥐는 꼴랭과 대화를 나누며 그의 몸짓은 인간의 것이다) 이 생쥐는 주인처럼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보조자는 상당히 자율적이다. 그래서 니꼴라가 해고되었을 때 생쥐는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 생쥐는 또한 꼴랭의 집을 마지막으로 떠난다.
이 예외적인 보조자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의식으로서 나타난다.
평론가인 알랭 코스트(Alain Costes)가 말한 대로 "꼴랭이 좋아 하는 이 생쥐는 그의 지각-의식 체계를 상징한다." 그래서 이 생쥐는 매우 예리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생쥐는 결혼식 이후로 태양이 평상시처럼 집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냈다. 니꼴라와 꼴랭이 이 사실을 아는 건 그 다음이다.
생쥐는 또한 완벽할 정도로 성실하다. 타일 바닥을 닦아서 원래대로 광택을 내려는 그의 집념을 보라. 그러나 니꼴라가 그랬듯이 생쥐 역시 이 시지프스를 연상시키는 일을 하느라 지쳐버린다.
앞서 인용한 알랭 코스트의 말 대로 생쥐는 꼴랭의 한 심적 영역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보조자'가 '주체자'의 내적 특성들의 객체화라는 점은 프로프나 그레마스 공히 인정하고 있다) 이 생쥐는 꼴랭을 고무시키는 명석과 진실의 의지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꼴랭이 불가능한 사랑을 탐색한다면 식크 역시 파르트르라는 덧없는 대상을 추구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장-폴 사르트르'를 음위전환시킨 '장-쏠 파르트르'에서 파르트르는 라틴어'pater'(아버지를 뜻하는)와 유사하며, '쏠(Sol)'은 '유일한(Seul)'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장-쏠 파르트르'는 식의 '유일한 아버지', 상징적 아버지다. 식크가 파르트르의 책 외에 그의 바지라든가 파이프를 수집한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바지와 파이프는 아버지의 속성이다.
행위자 모델을 통해 살펴보면 파르트르는 니꼴라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 이지적 초인이 사고(penser)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니꼴라라는 요리사가 행위(faire)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똑같다. 이들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식크와 꼴랭의 전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파르트르와 니꼴라는 '양식(nourriture)'이라 는 동일한 의미론적 축에 속해 있다. 그러나 요리사는 먹게 하고 철학자는 토하게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서로 대립한다. 니꼴라의 화려한 메뉴 목록에 파르트르가 쓴 토사물에 관한 책들의 제목이 대응한다.
니꼴라와 파르트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가 보조자인 반면 후자는 대상이라는 점에 있다. 이 요리사는 꼴랭을 도와 클로에를 정복하게 하는데 철학자는 알리즈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꼴랭은 이성의 대상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남성 모델을 모방하고 그 모델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식크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그의 아버지 모방은 이 아버지에 대한 동성애로 타락해 버리는 것이다.
식크는 단순한 '소비자'에 불과하다. 그는 파르트르의 책들을 수집하고, 파르트르의 강연회 녹음을 모을 뿐이다. 그가 파르트르의 책에 관심을 갖는 부분도 책의 장정이지 내용은 아니다. 그는 파르트르의 강연 내용에도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을 정신적 아버지와 동일시 한다는 것은 그처럼 글쓰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식크가 파르트르의 진지한 제자라면 그는 글쓰기의 모험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식크는 단 한순간도 글을 쓰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식크는 스노비즘의 희생자다. 식크를 통해서 비앙은 "사르트르 추종자들"을 비웃고 있다. 이 철학자의 강연회에 몰려드는 광신자들은 대부분 사르트르 책을 단 한 페이지도 주의깊게 읽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유행만을 뒤쫓고 있을 뿐이다.
식크의 이 거짓된 탐색이 속임수라는 걸 깨닫는 인물은 바로 이 탐색의 희생자인 알리즈다. 그 순간부터 알리즈는 '적대자'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녀가 적대자라는 것은 그녀가 자기 연인의 자기 상실의 두 가지 원인 즉, 생산자의 파르트르의 생산물을 유통시키는 서점 주인들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꼴랭과 클로에, 식크와 알리즈의 비극은 그들의 사태의 본질을 꿰뚫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꼴랭과 클로에는 수련이라는 은유적 악을 정확하게 명명하지 못했고, 식크와 알리즈는 파르트르와 서점, 경찰, 공장으로 구성되는 체제가 어디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가를 인식하지 못했다. 이 모든 악은 인간이 기계 부품처럼 취급되고 일회용 물품처럼 교환되는 현대산업사회의 물화된 체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보리스 비앙은 1946년도에 쓴 이 작품에서 그 같은 비극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다.
번역판으로는 <L'ecume deo jours>, 1979 10/18 발행판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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