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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May 15. 2018

몽마르트가 아니고
몽마르트르입니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흔히들 몽마르트라고 발음하지만 정확한 발음은 몽마르트르. 

Montmartre는 Mont과 martre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Mont은 산(몽마르트르는 높이가 해발 124미터다)이라는 뜻이고, martre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Mars가 변형된 단어이거나, 아니면 파리 최초의 주교인 성드니Saint Denis가 지금 사크레쾨르 성당 자리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목이 잘려 순교자martyr가 되어 생긴 단어다.


몽마르트르의 사크레쾨르 성당. 이 성당이 지어진 역사를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조국의 그것과 현실이 오버랩 된다.

 




1. 사크레쾨르sacré coeur, 즉 성스러운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말한다. 그러니 한국말로 하면 성심성당. 


2. 1875년에 초석을 놓았고, 1919년에 축성되었으며, 공식적인 완공연도는 1919년이니, 44년이 걸렸다. 


3. 이 성당은 1870년에 일어난 보불전쟁과 그 다음 해 5월에 벌어진 파리 코뮌의 결과다.
1870년 프랑스와 프러시아(지금의 독일)는 전쟁을 했다. 프랑스는 먼저 선전포고를 헀지만, 극심했던 군부의 부패로 완패했다. 그당시 프랑스를 다스리던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혔으니 두말하면 뭐하랴. 그러나 프랑스의 중심도시 파리는 성문을 잠그고 양심적인 정치인, 지식인들과 프롤레리타아들을 중심으로 프러시아군에 저항했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외세(프러시아)를 끌어들여 파리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한다. 
그리고 이때 베르사유궁의 거울의 방에서 프러시아에 굴욕적으로 항복한 정부에 대해 쌓인 파리시민들의 분노는 그 다음 해 5월 파리코뮌이라는 시민저항운동으로 표출된다. 파리코뮌이 처음 시작된 곳이 바로 몽마르트르 꼭대기다. 제 2 제정이 멸망하고 들어선 제 2 공화국은 파리시민들이 프러시아군에 저항할 때 자기네 돈으로 산 대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사크레쾨르 성당이 없는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서 대포를 지키고 있던 정부군 소대는 이 명령을 거부하면서 5월 한달 동안 파리 시내를 휩쓴 부르주아와 프롤리타리아의 시가전이 발발했다. 
<체리꽃 피는 시절>이라는 혁명가(?)는 이때 만들어졌다. 5월 마지막 주일("피의 1주일"이;라고 부른다)에 페르라세즈 묘지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시민군은 결국 패배, 묘지 안에 있는 "시민군의 벽" 앞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4. 소위 지배계층이었던 프랑스의 가톨릭 고위층은 보불전쟁에서 프랑가 패한 게 프랑스 국민들의 신앙심이 약해졌기 때문이라 주장하며 이 성당을 세웠다. 그리고 그 다음 해 파리코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감히 자기들에게 들고 일어나자 화들짝 놀라 성당 아래의 공원에 루이즈 미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Louise Michel은 파리코뮌 때 여성들을 이끌고 직접 정부군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운 여장부다. 
프랑스 지배계급은 이 공원에 그녀의 이름을 붙이고 사크레쾨르 성당으로 위에서 짓누르는 것이다.


5. 사진 오른쪽의 동상은 생루이Saint Louis(1226-1270). 원래 이름은 루이 9세로, 프랑스 왕 중에서 유일한 성인이다. 유럽의 왕들을 설득하여 십자군운동을 갔다가 튀니지에서 순교한 사람이다. 이 성당 오른쪽에는 잔다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프랑스 가톨릭이 이 두 성인을 저렇게 성당 앞에 세워두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도 저 두 사람을 추종한다. 


6. 이 성당은 특이하게도 방향이 동서가 아닌 남북이다. 그리고 파리 근교의 채석장에서 캐낸 돌로 지어졌다. 순례 성당이라서 장례식이나 결혼식은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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