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스타일에 결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서른 살 때 고향인 오르망으로 돌아가면서부터다. 여기서 그는 낭만주의적 화풍을 버리고 사실주의적 화풍을 추구하게 된다. 압도적인 스케일, 오르낭의 유지들과 그의 가족들이 등장아는 <오르낭의 장례식>은 1851년 살롱전에 출품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또 다른 작품 <돌 깨는 사람>은 프루동에 의해 최초의 사회주의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돌 깨는 사람들>
그는 1853년에 프랑스 회화의 견고한 아카데미즘을 깨부수기 위해 <목욕하는 여인들>을 발표하는데, 벌거벗은 채 베일을 쓰고 있는 여성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일대소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상화되지 않은 평범하고 뚱뚱한 여성이 등장하는데다가 이 여성의 발이 더러워 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 당시 육체의 불결함은 곧 정신의 불결함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목욕하는 여인들>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던 그는 정치에도 적극 참여하여 파리코뮌 당시 예술 분과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고, 나폴레옹의 제국전쟁을 상징하는 방돔 광장의 기둥을 무너뜨려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아 본인 돈으로 이 기둥을 다시 세워놓으라는 판결을 받았다.
무너뜨려진 방돔의 기둥
결국 재산이랑 그림이랑 다 압류당한 그는 스위스로 망명했고,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
1. <오르낭의 장례식>, 1850년, 315 x 668cm 1850년은 프랑스 역사로 보나, 근대예술의 역사로 보나 매우 중요한 해다. 루이-필리프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장차 나폴레옹 3세가 될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쿠르베는 소위 제도권 예술과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진다. 쿠르베의 고향인 오르낭은 브장송 근처의 주민 4천 명에 불과한 마을이다. 인물들 뒤쪽으로 펼쳐진 석회암 절벽은 이 지대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혁명 이후로 사망자가 많아지면서 마을 한가운데 성당 안에 있던 묘지가 좁아지자 오르낭 주민들은 마을 외곽에 새로운 묘지를 만들었고, 이 그림은 바로 그 묘지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을 그렸다. 그림은 세 부분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맨 왼쪽은 장례식을 진행하는 사람들이고, 가운데 부분은 남자들, 맨 오른쪽은 여자들이 모여 있다. 모두 27명인데, 샤갈은 이들 모두를 자기 아틀리에로 불러 포즈를 취하게 했다. -성무일과서를 읽고 있는 사람은 신부. 묘혈 반대편의 혁명가(초록색 옷 입은 사람)와 마주 서 있다. -묘혈 앞에 무릎꿇고 있는 사람은 묘혈 파는 일을 하는 앙트안 조제프 카사르다. 시선은 저승의 일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로, 무릎은 이승의 사람들에게로 향해 있다. -맨 왼쪽의 흰 장갑 낀 사람들은 관을 들고 온 사람인데, 얼굴을 관에서 돌리고 있다. 이 당시 시골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기까지 며칠 동안 시신을 그냥 놓아두는 관습으로 인해 악취가 풍겨서일 것이다. -이 사람들의 오른쪽, 뒷줄에 서 있는 사람들은성당관리인들이다. -신부 오른쪽의 붉은 옷 입은 사람들은 성당지기. -그 오른쪽의 네 명은 읍장과 공증인, 변호사 등 마을 유지고, 그 뒤의 두 명은 쿠르베의 어릴 적 친구다. -그 오른쪽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과 그 왼편은 혁명가들. 1792-1793년 사이에 혁명옹호자들이 입고 다니던 의상을 입고 있다. -혁명가 오른쪽의 여성은 쿠르베의 어머니. 그 오른쪽 세 명은 누이들이고 어린아이는 사촌동생.
2. <화가의 아틀리에>, 1855 1855년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으나 거절당해 작가의 개인전에 전시되었다. -왼쪽 부분 : "왼쪽에는 평범한 삶의 다른 세계, 대중, 빈곤, 가난, 부유함, 착취당하는 자들, 착취하는 자들, 죽음으로 사는 자들이 있다."(쿠르베)
-가운데 부분 : 화가는 물론 쿠르베 자신이고, 그가 그리고 있는 풍경은 그의 고향인 오르낭이다.
-오른쪽 부분 : 맨 오른쪽은 시인인 보들레르. 그 왼쪽 두 사람은 몽펠리에의 수집가이자 푸리에주의 활동가인 사바티에 부부. 서로 껴안고 있는 남녀는 지금 자유로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의 친구인 소설가 샹플뢰리. 안경을 쓴 사람은 역시 그의 친구인 프루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