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Mar 13. 2018

복세편살은 아무나 하나

멋진 언니들은 소심한 우리와 성향이 달라서 롤 모델로 삼을 수 없었다 


복세편살.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는 문장을 네 글자로 줄인 말이다. 사자성어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한 신조어를 알게 된 건 작년 이맘때쯤. 친구는 비슷한 말로는 나씨나길(나는 x발 나의 길을 간다)이 있다며, 우리도 이렇게 남 눈치 보지 말고 자유롭게 살자고 했다. 그래! 복세편살, 나씨나길! 얼마나 멋진가. 남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은 하고. 내가 좋은 걸 선택하는 삶. 그리하여 야심차게 새로운 슬로건을 도입한 우리는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됐다. 복세편살의 DNA는 타고나야 한다는 것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소위 말하는 마이웨이의 삶을 살긴 어려워 보였다. 강연을 하거나 책을 쓰는 멋진 언니들은 소심한 우리와 성향이 너무나 달라서 롤 모델로 삼기에 부적절했다. 성능도 좋고 디자인도 예쁘지만 너무 커서 내 방엔 안 들어가는 양문형 냉장고 같달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바로 그게 이 글을 쓰게 된 연유다. 소심하게 살며 여기저기 치이다 약간의 노하우를 습득했고, 요샌 마음이 꽤 편해졌는데, 그 과정을 공유해볼까 싶다(생존력이 낮은 소심이들은 이렇게라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챙겨야 한다!). 


일단 앞서 말했듯 마이웨이의 삶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다. 대세를 거스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대학생 때 꼭 해야 할 10가지’ 같은 모범 답안은 무시한다고 쳐도. 모두가 동아리에 가입하고, 미팅에 나가며, 유럽 여행을 떠나는데, “나는 안 해”를 외치고 드러누워 잠이나 자기란 아무래도 힘들 것이다. 신입생 시절 나는 불안해하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세에 끌려다녔다(역시나!). 연극에 별 관심 없었지만 같은 무리가 된 친구들이 다들 한다기에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고, 일찌감치 수업이 끝나 할 일은 없지만 동기들이 집에 안 가기에 과실 소파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과 엠티, 동기 엠티, 소모임 엠티 등등 썩 내키지 않는 행사에도 꼬박꼬박 나갔다. 대세에 휩쓸리는 거 말고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명확하게 하고 싶은 것 자체가 없었다. 이십 년 동안 별생각 없이 수능 공부만 했으므로 나도 나를 잘 몰랐던 거다. 


그렇게 한 선택으로 채운 대학 생활엔 당연하게도 후회스러운 점이 많다. 평균을 내보자면, 정말로 적성에 맞지 않거나, 내 인생에 쌀 한 톨만큼도 도움이 되지 못한 것들이 8할, 별생각 없이 했는데 의외로 좋았던 게 2할 정도. 불필요한 8할 주변을 기웃거리느라 때를 놓쳐서 영영 하지 못하게 된 일들도 있다(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과 동기들이랑 어울리려고 과방에 버린 시간에 연애나 한 번 더 했어야 했다). 


인생에 어떤 에피소드를 들일 것인지 선택하는 일은 쇼핑과 비슷해서, 하면 할수록 나만의 기준이 견고해지고, 그에 따라 성공률도 높아진다. 엄마가 사 준 옷만 입던 아이가 수많은 실패 끝에 ‘나는 키가 크니까 총장이 최소 87cm 이상인 옷만 입을 수 있어’ 같은 기준을 세운 것처럼. 대학 생활의 8할을 시간 낭비로 흘려보낸 덕에, 어떤 일을 할까 말까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남의 말이 아닌 내 기준으로 판단하게 됐다. 어떤 에피소드가 날 행복하게 해줄지는 나만 아는 것이니까. 


영화처럼 과거로 돌아가 스무 살의 나를 도울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본인이 뭘 좋아하는지 아직 모르는 그 아이는 어차피 3년은 헤매게 될 테니… 뭘 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단 마음으로 지내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나만의 기준을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기준이 없을 때는 누구나 남의 말에 휩쓸리게 된다고. 그러니 헛짓하느라 시간 낭비한 자신을 너무 다그치지 말라고 도닥여 주는 게 낫겠다. 그것도 아니면, 지도 앱의 추천 경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모든 경로를 직접 짜서 실험해본다는 친구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는 경로가 아니라 창밖 풍경이 멋진 경로를 찾고 싶다던 친구처럼, 천천히 너만의 경로를 찾아보라고. 이제 곧 봄이니 조금 헤매도 지각해도 괜찮다고 말해줘야겠다.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드는 주문

인생은 쇼핑과 같다. 하면 할수록 성공률이 높아진다. 



ILLUSTRATOR liz 

매거진의 이전글 쫄보가 낯선 사람을 만나면 생기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