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숙희 Nov 30. 2019

무료한 날들

선물처럼

나는 별일없이 산다라는게 이런걸까

이렇게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은 거의 생애 처음인 것 같다. 

하루 스케줄이 중학생때랑 비슷한데, 그때는 머리가 크느라고 스케줄은 심플했어도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에 이처럼 단조로운 느낌으로 살지 않았다. 고등학생때는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열심히 살았던 때였고, 대학때는 밤새 술마시고 망가지는게 좋았고, 그 뒤로는 맨날 뭐하지뭐하지 뭐먹고살지 뭐하고살지 로 정신없고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그야말로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회사는 가깝고, 일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힘들지 않다. 아무리 힘들어도 출퇴근 시간만 칼같이 지켜지면 노프라블럼이다진짜. 이렇게 일상과 회사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는 회사도 처음이다. 취업 완전 잘한 것 같다. 월급이 적은게 딱 하나있는 단점이지만, 그건 나는 모든걸 다 가졌고 모든 걸 다 이루어서 더는 하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는 자기 위안으로 잘 이겨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저렇게 생각한다. 집사고 차사는 거 빼고는 해보고 싶은거 다 해봐서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아주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왔다 드디어.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나서, 결혼과 출산도 꼭 해야되는 과제가 아닌게 되었고 집사고 차사는 건 존나 힘들다는 걸 세상이 다 알아주니 변명하거나 움츠러들 필요도 없고 그냥 뭐 할게없다 요즘엔.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힘내라 는둥 니 잘못이 아니라는둥 위로와 응원들이 넘쳐나니 이건 마치 나는 대충 아무데나 드러 누워서 별을 보고 있고 마음은 한 없이 평안한 가운데, 이따가 떡볶이를 시켜먹을까 라는 고민을 하는중인데 옆에서 힘들지? 하고 담요 덮어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럼 나는 마음이 너무 평안하여 말조차 잘 나오지 않으므로 그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은은한 미소를 날려주고, 속으로는 오예 담요득템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려 별을 본다. 이것은 담요나주고 저리가 나는 괜히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담요를 덮어주는 너랑 잘 안맞을거 같아 라는 비언어적 메세지다.



벌써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것 같은 일상의 여유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전개가 빠르지? 아직 좀 더 휘둘려야 되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간간히 하다가 하지만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자 휙 치워버리고 낮잠잘 수 있는 이런 무념의 삶

어쩌면 이건 대부분이 치열한 삶의 과정 속에서 가끔씩 주어지는 선물같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맘껏 즐겨주겠다.

작가의 이전글 마지막 투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