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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디아워스

도서관에서

by 우엥

주말에 도서관에 오면 앉을 자리도 찾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점심 시간을 조금만 넘겨 와도 주차할 자리도 없다.

나는 가장 인기 없는 자리에 앉으며(책상이 의자의 높이와 비슷해서 공부하기 불편한 자리)

상어른인 내가 불편을 감수하마 편히 공부해라 아이들아 라며 나혼자 크게 뿌듯해한다.

오늘은 차에 기름도 없고 날씨도 좋아서 버스를 타고, 걸어서 도서관에 왔다.

주유하러 가기 귀찮아서 버스 타고 다닌다.

우리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서관은 2군데 있다.

서연이음터도서관, 왕배푸른숲도서관

서연이음터도서관은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고 왕배푸른숲도서관은 도보로 40분, 차로는 7분 정도 걸린다.

그래서 주말에 올 때는 주차를 위해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해서 온다.


가까이 있는 도서관을 두고 왕배푸른숲도서관까지 오는 이유는 여기는 책장이 미어터지도록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서연이음터도서관은 책장의 절반 이상이 비어있다. 한 달에 한 번은 희망도서신청을 받아 내가 원하는 책을 구매해주고 우선 대여권을 주는데, 나는 주로 비싼 컴퓨터 관련 책들을 신청한다.

이런 책들은 참 비싸고, 나한테는 지금 내가 하는 프로젝트에 필요한 내용만 몇 챕터 골라 읽고 말 책들이라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운 책들이다. 이렇게 공공도서관에 두고 필요한 사람들이 다같이 읽으면 좋잖아!


서연이음터도서관은 너무 전문 도서라는 이유로 신청할 때마다 번번이 퇴짜인데 왕배푸른숲도서관은 군말없이 책을 구매해주고, 구매하면 얼른 빌리러 오라고 카톡도 보내준다.

신청하신 도서의 구매가 완료되었습니다. 언제까지 빌리러 오세요

라는 카톡은 언제봐도 기분이 좋다.

내가 사고싶은 게 책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주던 엄마 생각도 나고.


당시 엄마는 나에게 대학을 가지 않으면 안되겠니 라고 부탁할 정도로 가난했는데도 책이라면 또 가격도 묻지 않고 바로 카드를 주었다. 대학은 못 보내줄 것 같은데 책을 읽겠다고 하면 사주고야 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대학도 못 보내줄 것 같은데 내 딸이 자꾸 책을 좋아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릴 때 나는 너무 조용해서 얘가 어디있나 찾으면 작은방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걸 모두 지켜본 엄마가 그런 딸에게 대학은 못 보내준다고 말해야 했을 때 엄마의 마음엔 어떤 말들이 있었을까

엄마는 어린 시절 국어를 잘해서, 초등학교 졸업식날 국어 선생님이 엄마에게만 특별히 자장면을 사주었다고 했었다. 어린 엄마가 국어를 잘했다면 내면에 슬픔을 느낄 많은 단어와 정서들이 뿌리처럼 남아있겠지

뭐였을까 어떤 말들을 떠올렸을까


지금에 와서는, 그때는 니가 치킨 한마리 시켜달라고 할 때도 고민을 많이 했어 그때 엄마한테는 큰 돈이었거든 하고 웃으면서 말한다. 씁쓸하게나마 웃음과 함께 떠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치킨 한 마리도 고민하던 엄마가 몇 권 고르면 십만원이 넘던 책 구매를 위해 카드를 내주던 마음을 짐작할 말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 아주 자주 저 때를 떠올렸으면서도 찾지 못했다.


나는 그때 고생하는 부모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 모두 그렇듯 빨리 철 들어서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지 않던 조숙한 청소년이었는데, 나는 이런저런 책이 필요해 라고 말할 때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로 고집을 부리듯이 말했다. 안사주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말했다.

나는 특별해라고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항상 책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야를 말할 때 강해지는 기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난한 건 알지만 내가 똑똑한 것도 알아야겠는 청소년이 가지는 자존심 같은 것.


얼마 전 유튜브 영상을 보기전에 뜨는 광고에서 문제집을 마음껏 사보는게 소원이에요 하고 웃으며 말하는 아이가 나왔다. 아이의 꿈을 지켜주세요 하고 후원 방법을 안내하며 마무리 되는 광고였다. 엉뚱하게도, 나도 저렇게 웃으면서 말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눈을 부릅뜨고 말했지, 안 사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책은 여러모로 나의 약한 부분과 많은 관련이 있다. 지금은 일상의 권태와 삶의 공허와 악령처럼 떠도는 세상의 표상들을 잊기 위해 책을 읽는다. 내 나이에 재산과 연봉이 어느 정도여야 한다는 이야기, 어디가 어떻게 예뻐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모두 허상이고 아무런 진실도 담기지 않은 표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을 확장하고 순화시키지 않으면 나는 또 어느새 피부과에 가서 큰 돈을 쓰고 저 사람들은 얼마나 벌까, 나는 평균일까를 궁금해하고 만다.

괴물과 싸울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내가 괴물이 되지 않아야 하는거다. 책을 읽지 않으면 나는 쉽게 괴물이 된다. 저 표상들의 세계에서 강하지도 않은 내가, 나보다 약한 사람을 찾아 나의 평균을 확인하는 괴물이 된다.


한 사람의 자아는 절대 타인에 의해 모두 파악될 수 없다.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나를 한 번 표현해봐 줄 수 있어?

하고 질문한 뒤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면 어쩐지 내가 축소된 기분이 든다. 나의 자아는 타인들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데도 타인은 절대 내 자아를 모두 알 수 없고 그렇게 망가진 내 자아는 되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자아를 축소시키며 회복된다. 뻔한 캐릭터잖아, That's not an original story 라는 식으로.

그 안에 놀라운 복잡함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자아도, 인정 받지 못해 단순해진 내 자아만큼 단순하게 만들어놔야 안심이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괴물이 되어간다. 그래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책을 읽는다. 가난했던 엄마가 가격을 묻지 않고 책을 사주며 내 자존심을 지켜준 것처럼.

나는 진실과 사랑이 없는 표상들에 잠식당하지 않고 나만의 삶을 살고야 말거야

라는 내 고상한 각오를 지키기 위해, 한 번 사는 인생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도서관에 왔다.

이 넓은 우주 속, 이 작은 행성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 이 모든 순간들을 제발 잘 살아낼 수 있기를 담담하고 간절하게 바란다. 사랑과 죽음이 언제나 가까이 있음을 더 자주 떠올리며 살 수 있게 되기를

내 마음 속에서 타인의 복잡한 자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선의로 만들어지는 사랑이 마르지 않기를 아주 아주 간절히 바란다. 이게 내가 내 인생을 통해 이뤄야 하는 가장 큰 가치라고 믿는다.

아주 평범한 어느 날 맞이할 죽음 앞에서 아쉽지 않을 만큼 이루고 싶다.


기껏 도서관까지 와서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는 이유는

책 반납 연체하는 바람에 아무런 책도 대여할 수 없는 신세이기 때문에

책을 고를 의지가 없기 때문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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