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출근 셔틀버스에서 내리는데 기사아저씨가 딸 같다며 우산을 줬다. 오늘 비 많이 올건데 우산도 안 챙겼냐고 얼른 가져가라고 우산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서 내렸다. 그때 나한테 우산이 없었던 건 회사 책상 아래에 우산이 두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내가 우산이 없을까봐 동료들이 내 책상 아래 놔둔거였다. 나만 늦게까지 일해야 했을 때 먼저들 집에 가면서, 책상 아래에 우산뒀어요 하면서
그리고 뒤따라오던 다른 동료가 어 나도 책상위에 우산 뒀는데 하하 골라쓰세요 했다. 내가 퇴근하던 늦은밤엔 비가 그쳐있었고 그렇게 내 책상에 우산이 두개나 있었다. 오늘부턴 세개가 되었고 책상이 좁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착할때마다 나는 감동보다는 뭐라도 사서 보답해줘야 할 것 같은 부채감을 느낀다. 그러나 내가 보답으로 뭔가 해주면 관계가 더 친밀해질까봐 걱정하며 보답을 참는다. 나에게 들어오는 상냥한 인풋들이 귀찮아진게 언제부터였더라
언젠가부터 전화번호를 절대 교환하지 않거나, 교환해도 금방 삭제해버리거나, 환한 웃음에 어색하게 굴며 금방 자리를 떠버리기 등으로 새로운 사람을 사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서 모든 사랑과 갈등을 정면으로 부딪혀야해 라고 생각하지만, 진실한 마음이 하는 말이 아니면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점점 나의 지배적인 감정이 되어가고 있다. 이방인의 주인공이 생각난다. 그 이방인은 사형 선고를 받고서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다운‘ 감정을 보여준다. 내가 여행을 좋아했던 건 완전한 이방인으로의 고독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못 알아듣을 말만 들리던 세상을 편안한 관찰자가 되어 걷는 기분. 얼마나 황홀했던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사람들과 이야기 했을 때,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책벌레라고 부르는 화자에게 대입하면서 가만히 앉아 책이나 파고드는 삶은 좋지 않아, 햇살과 파도 속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감각하는 삶이 좋지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난 화자가 조르바와 이별하는 책의 마지막에, 결국, 그래도 난 토할때까지 책을 읽어보려고요 라고 말하는 게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몸으로 감각하며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한자리에 앉아 사색만으로 천하를 통찰하는 사람도 있는거다. 붓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세상을 깨우쳤고, 뉴턴은 시골집 사과나무 아래서 얻은 아이디어로 프린키피아를 썼다. 프린키피아의 서문에 내가 이제부터 세상의 얼개를 설명해보이겠다 라고 썼다. 압도적인 자신감, 저 문장 하나만으로도 내 세상의 크기를 가뿐히 넘어버리는 것 같은 뉴턴이 쾅 도끼같다. 마음 속에 떠지는 눈
조금 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보자 라는 계속되는 다짐과 야무지게 다져온 고독에의 욕망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가운데, 나는 어떤 사람이 되려나?
너는 어릴 때 늘 조용했고,너무 조용해서 뭐하나 찾으면 방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었어 키우기 너무 쉬웠어 라고 말하는 엄마의 눈 앞으로 어른거리는 내 본성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