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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디아워스

도서관 산책

by 우엥

도서관에 오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꽂혀있는 자리를 안다

삼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박완서,이민진,은희경의 소설들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김훈의 수필집이 어디에 있는지, 고전 문학 전집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디자인이 똑같은 전집들의 빽빽한 사이 밀란 쿤데라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기록, 조선 시대의 기록, 그리스 신화, 컴퓨터 관련 전문 서적들이 어디에 꽂혀있는지 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있는 곳에 도착해서는 잔인하고 슬픈 고통에 가까운 감상만 느끼고 책은 꺼내지 않고 떠난다. 눈도 한번 찡그리는 것 같다. 실제로 만날 수 있다면 말도 걸고 싶지 않은 비극의 정서를 가진 여자. 어떤 슬픔은 아는 척 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 자리들을 정처없이 돌며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책들이 제자리에 잘 있는지, 누가 빌려갔는지, 서가를 정리하며 자리를 옮기지는 않았는지 확인한다. 그 책들이 나에게 남긴 자취들이 강하게 떠오르는 걸 느끼며 산책한다. 책을 펼쳐들고 한 문장이라도 읽으면 금방 생생하게 살아날 것 같은 마음들을, 당장이라도 시동이 걸릴 것 같은 기색만 느끼고 천천히 걸어 멀어진다.

새로 읽을 책을 고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내가 기억하는 자리에 잘 있는지 확인하며 돌아다니는 걸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고른 책도 이전에 읽었던 책, 그 문장들이 몹시 그리워져서 다시 꺼내고 말았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밀려오는 그리움과 반가움에 져버렸다. 어쩔 수 없이 또 읽어야 한다.

릴케가 말했었나 우리는 책들 속에서 나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본다고.

오늘도 나는 내 그림자로 젖은 것들 속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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