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디아워스

사라진 폭력

그 자리에 더 무서운 폭력

by 우엥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은 가슴 아픈 이야기다.

눈 앞에 검은 벽이 탕 내려진 것 같은 좌절과 체념이 짧고 단호한 문장으로 씌여져 있다.

작가가 글을 쓸 때는 정맥을 그어 그 피를 종이 속으로 흘려넣으면 된다고 했던가. 이 책은 피를 다 흘리고 남아 있는 피가 없는 차가운 몸으로 쓴 글 같다.


1970년대, 약 오십년 전의 이야기임에도, 현재의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의 가난과 노동 억압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가슴을 치는 무언가가 있다. 기계가 돌아가는 속도가 인간이 움직이는 속도를 정하고, 무서운 공장의 소음 속에서 까무러치기 직전의 긴장감으로 기계 사이를 뛰듯이 걸어다니는 난장이의 아들딸들. 그 노동의 끝에서 노동법을 무시한 너무 적은 임금과 회사의 수익을 사회의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기사를 만난다.


현시대의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사라진 이야기지만 기계의 속도가 인간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 소음 속에서 까무러치기 직전의 긴장감으로 살아가는 고통은 여전히 있지 않나 생각했다.

기계의 속도가 나의 삶을 빠르고 윤택하게 만든다는 최면과 화려한 빛깔을 뒤집어쓰고 소음이 아닌 척 하고있는 소음들이 인간 정신의 첫번째 겹을 속이므로, 우리는 왜 우리가 스스로 취한 풍요로운 물자 속에서 고통스러운지 알아채지 못한다. 억압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또 노골적으로 가하는 방식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억압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으로 교묘하게 진화한 것이지 사라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에게 모래를 섞은 싸구려 보리밥을 주며 이익을 지켰던 것이 시간이 지나보니 결국엔 노동자의 노동력을, 즉 생산자의 이윤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라는 깨달음이 있어 윤기나는 쌀밥을 충분히 주는 것이지 인간 사랑에 기반한 변화는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는 더 복잡한 식으로 힘들어졌을 뿐이다. 하얗게 빛나는 쌀밥을 충분히 먹으면서는 내가 왜 힘든지를 항변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교묘해진 폭력에 대해 생각한다.

부동산,자동차,명품,화장품,시계,옷,신발 등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등을 끝까지 떠밀려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억압들에 대해서.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의 많은 질병들이 극복되었지만, 사람들의 정신을 첫번째 겹, 그리고 두번째 겹 점점 깊게 기만하는 세상이 제약 회사의 이윤을 위해 수많은 정신병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정신의 핵심을 빼앗기고 있다. 모래 섞인 보리밥을 먹을 때도 뺏기지 않았던 것, 그것을 빼앗기고 있다.

내가 나의 노동 시간, 즉 내 삶의 시간과 맞바꾸기로 선택한 것이 가방 혹은 시계였을 때를 가만 돌이켜보자. 그걸 차고 내가 하고싶은 것이 내 주변 사람들을 약올리는 일이었다는 걸, 내가 힘써서 맞서고있는 대상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가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로 어느새 바뀌어져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면 나는 계속 내 삶의 시간과 맞바꾼 아파트와 자동차로 주변 사람들과 신경전을 하며 인생을 다 써버려야 한다. 그와 함께 내가 맞선 대상만큼 하찮아진 내 자아에 절망해야 한다. 정말이지 무서운 폭력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리운 사랑과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