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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디아워스

고통에 관하여

by 우엥

삶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즉 신이 혹은 세상에 나에게 던진 질문들을 운명이라고 느낀다.

질문 자체에는 내가 관여할 수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만의 대답을 내놓는 것.

운명에 수긍함과 동시에 운명에 수긍하지 않는 씩씩한 태도다.

이런 인식이 일상을 대하는 기본 인식으로 고착화 되면서 나는 어딘가 초연하고 달관한 듯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의 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는 크고 작은 일들이 나에게는 잘 느껴지지가 않고 그저 죽으면 어차피 사라질 것들이라는 초월적 감상과 함께 구름이 흘러가듯 흘러간다. 사건들이 내 안에 들어와 동요를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흘러만 간다. 내 하루들에 놓여져있는 일들과 사람들이 모두 피상적으로 느껴지고

세상이 나에게 내보이는 표상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표상들에게서 끊임없이 어떤 메세지를 읽고, 메세지를 읽은 다음에는 세상이 나에게 이렇게 신경을 많이 쓸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읽은 메세지를 곧바로 폐기처분한다. 어느 정도의 초월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 권태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뉴스를 보면서 알게 되는 잔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다는 건 계속 접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을 살인한다던가, 재산을 가지고 다투다가 가족을 죽인다던가, 오랜 세월동안 아픈 가족을 간병하다가 결국 죽인다던가, 아내와 어린 자식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던 가장이 뺑소니 사고로 죽는다던가, 오랜 시간 혼자 지내다가 혼자 지내던 방에서 죽어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도 몰랐다던가

이런 뉴스들을 읽다보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고통이 이토록 흔하게 있는데 나는 어떻게 그 많은 고통들의 체를 통과해 이 곳에서 무사히 평안한가 하는 질문에 도착한다.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구경꾼으로 살아온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며 내 인생을 주관하는 누군가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단테의 손을 잡고 연옥을 구경시켜주는 베르길리우스 같은 존재가 내 인생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들은 때로 칼날 같다. 아니 아주 자주 칼날 같다. 그 말들은 내 마음 속에도 남아 내 마음도 찢는다. 그 말들은 내 마음을 찢고나서도, 내 마음 속 가장 탄탄한 지대 위에 남아서 조금이라도 불운한 일이 일어나면 내가 나쁘게 말해서 벌을 받았구나, 나는 벌을 받는거야, 이게 내가 받는 벌이구나 체념하고 슬퍼하게 된다. 나는 계속 사람들의 마음을 찢고 돌아와 내 마음도 찢는 말들을 하고 그리하여 크고 작은 나쁜일들을 형벌이라고 느끼는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될 거라는 참담한 확신을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죄를 짓는 것과 그래서 벌을 받는다고 느끼는 일상은 아주 오랜시간 아주 자주 반복되어 왔고, 이게 내가 이번생에 겪을 고통인가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타인의 고통들을 나는 어떻게 저 고통들을 다 피했지 골똘하게 구경하면서 내가 받는 벌에 대해서 생각한다. 인간은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는 원죄 개념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냥 내가 일상적으로 짓고 있는 죄에 관해, 죄를 지으면 안된다는 다짐마저 무용해져버린, 망가져버린 내 정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점점 더 말이 없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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