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g Apr 08. 2021

추억과 소망 사이

기승전 아내 사랑

주변 또래들 중에 좀처럼 나보다 빠른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절 육상을 했었다. 현재는 잘 모르겠으나 그 시절 운동은 엘리트 체제였다. 학업은 당연히 뒷전이 되고 운동을 위해 수업을 빠져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당연시하던 때였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결정의 순간이 왔다. 한 고등학교로부터 영입 제의를 정식으로 받아 학업을 이어갈 것인지 육상으로 내 진로를 정할 것인지 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시 대회에 나갔던 적이 있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나는 매우 빠른 사람이었지만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나의 빠름은 평균을 상회하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이유였을까?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운동을 접고 학업을 선택했다. 다행이었던 건지 불행이었던 건지 나는 학업 성적이 우수한 편이어서 운동을 포기하는 것이 큰 고민이 되진 않았다.


지금껏 내가 가진 탤런트 중에서 가장 소질이 있는 탤런트가 무엇이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운동이었다고. 어쩌면 나는 고등학교에서도 운동을 계속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1년 넘게 못하고 있지만 불혹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젠 허리와 무릎도 온전하지 않음에도 계속 농구를 취미로 하는 건 어쩌면 그때의 미련이 남아 있어서는 아닐까 생각을 한다.   

  

취미로 하는 농구이지만 나는 농구화에 대한 욕심이 정말 크다. 일주일에 겨우 2번 농구를 하면서도 내가 가진 농구화는 열 켤레도 넘는다. 돌아가며 한 번씩 신으니 몇 년 된 신발들도 여전히 멀쩡해서 사고 싶은 농구화가 생겨도 참아야 하는 지경이다.      


돌이켜보면 신발에 대한 애착은 육상을 하던 시절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실력으로 뒤지는 것도 싫었지만 장비에서 뒤지는 것도 참 싫었다. 친구 중 하나가 예쁘고 좋은 신발을 신으면 갖고 싶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마구 졸라 대진 않았다. 아마도 좀 일찍이 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내 눈을 한 번에 사로잡는 예쁜 러닝화를 봤다. 운동을 하는 녀석도 아닌데 같은 반의 한 친구가 나이키 Air Max 93을 신고 나타난 거다.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긴 참음 끝에 결국 아버지께 사고 싶은 운동화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고 아버지와 함께 운동화를 사러 동네 나이키 매장에 방문했다. 그런데, 두둥! 내가 갖고 싶은 그 모델은 이미 다 완판이 되어 더 이상 구매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허탈함과 좌절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매우 낙심했던 내게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다른 신발이라도 사주시겠다는 아버지의 응원에 힘입어 걔 중에 그나마 비슷해 보이는 Air Max 180을 선택했다. 하얀색 바탕에 분홍색과 파란색이 어울리지 않게 조합된 운동화였다. 고지식한 내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 매우 아방가르드적인 조합.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신발이라도 사든지 아니면 맨 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든지. 울며 겨자 먹기로 찝찝한 마음을 간직한 채 그 신발을 구매했다.      

나는 내 소유물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남다르다. 내 취향에 그토록 안 맞는 신발이었지만 Air Max 180은 어느새 내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었고 마르고 닳도록 신고 다녔다. 너무 자주 신어 낡은 신발은 결국 에어창이 통째로 떨어지고 말았고 어쩔 수 없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 애장품이 사라진 슬픔이 컸다.    

 

이 슬픔을 겪고 20년이 훌쩍 넘었던 2018년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Air Max 180과 Air Max 93이 다시 출시된 것이다. 원래 사고 싶었던 신발과 대신 구입해 내 추억이 된 신발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 왜 흥분이 되지 않겠는가.      


신발과 의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똑같은 제품이 한국보다 미국이 많이 저렴하다. 평소 애용하는 미국 Footlocker 온라인 스토어에서 두 제품을 관심 상품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또 고민을 시작했다 신어보지 못한 93을 살 것인가 추억 돋는 180을 살 것인가. 행복한 고민을 하며 15~20% 할인쿠폰이 적용되는 시기가 어서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내 사이즈가 모두 매진되어 버렸다. 할인 좀 안 받고 사면 어떻다고 좀 싸게 사보겠다고 기다리다 내게 온 행복한 기회를 놓쳐버린 것 같아 너무나도 허무했다. 이 신발은 그저 추억으로만 가져야 하는 것인가 보구나...      


미련이 남아 혹시나 물량이 추가로 입고되진 않을까 싶어 하루에 한 번씩은 Footlocker를 들락거렸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인가. 두 신발이 모두 추가 입고되었고 심지어 할인까지 적용이 가능해졌다. 더 이상 내 행동을 미룰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결정을 못 한 한 가지! 둘 중에 어떤 신발을 고를 것인가! 내겐 너무도 어려운 결정이었다. 추억이냐 이루지 못한 소망이냐! 살을 깎는 고통을 느끼며 180을 포기하고 신어보지 못했던 Air Max 93을 구매했다.     


아내는 이 지난한 과정을 옆에서 다 지켜보고 알고 있었다. 힘든 결정 끝에 93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180도 사. 결혼 기념 선물로 둘 다 사줄게!” 유레카! 그러나 마음이 이렇게 관대한 나의 아내는 본인의 용돈 통장 잔액이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결국 통장 잔액 형편에 맞게 180을 선물로 받았다.     

구입 후 3년이 흘렀다. 180은 이번에도 너덜너덜해졌다. 아직 에어창이 떨어져 나가진 않았으나 낡고 더러워졌다. 93은 주로 실내 운동용으로 신다 보니 아직도 산지 몇 달 안 된 것 같은 상태이다. 그래도 중학생 시절보단 오래 신고 있다.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돌아가며 신을 신발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몇 년 후가 될까? 나이키에서 다시 Air Max 93과 180 레트로 제품을 출시할 날이. 그때를 위해 용돈을 또 알뜰히 아껴둬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간헐적 단식’ 유행에 동참해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