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팝의 사전에 록발라드라는 장르는 없다. 팝의 본고장 영국이나 미국에서 록발라드라고 하면 아마 못 알아들을 것이다. 그 동네에서는 슬로우록이라고 하면 대충 우리의 록발라드와 의미가 통하는 것 같다. 그마저도 널리 쓰이는 명칭은 아니다. 그네들에게는 록밴드가 느린 템포의 곡을 연주한다는 자체가 이채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록발라드는 지극히 한국적인 개념이다. 이런 장르가 인기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독보적일 것이다. 일찍이 신해철은 한국에서 록 앨범 내봤자 발라드 한 곡 히트하고 만다며, 이를 록빙가(록을 빙자한 완전 가요)라고 자조했었다. 실제로 Helloween, Scorpions, Judas Priest 같은 레전드 밴드들도 우리나라에서는 발라드 한두 개 빼고는 별로 알려진 곡이 없다.
근데 인기가 있는 데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다. 록발라드의 특징을 요약하면 대략 ‘서정적인 사운드, 마이너풍 코드 진행, 강렬한 기타 솔로, 고음 보컬의 절창, 뚜렷한 기승전결 구성’ 쯤 될 것이다. 딱 우리나라 사람들(특히 남자들)이 좋아하는, 쓸쓸하면서도 우수에 찬 감성을 극대화하는 조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런 곡들은 시대와 유행을 잘 타지 않는다. 나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이런 곡들이 땡길 때가 있다. 다음의 리스트가 대표적이다.
록발라드의 장르적 전형을 보여주는 곡. 무려 1974년에 나왔다. 이 스코틀랜드 밴드에 대해서는 이 곡 말고는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미국과 영국에서도 차트 상위권에 올랐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았다. 절규하는 듯한 고음의 보컬이 딱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1980년대에는 이런 팝 메탈, LA 메탈 밴드들이 인기가 많았었다. 이 밴드 외에도 Bon Jovi, Skid Row, Firehouse 등이 같은 계보에 속한다. 이들은 아무래도 팝 성향이 강해서 디스코그래피에 록발라드 명곡들이 많다. 그중 이 곡은 원래도 히트곡 부자인 이 밴드의 대표작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오케스트라가 이끄는 세련된 사운드가 돋보이는 명곡이라서 골라봤다.
불멸의 히트곡 <Open Arms>로 유명한 밴드. <Open Arms>는 우리나라 가수들도 하도 많이 커버해서 젊은 세대도 많이들 안다. 이 곡은 그만큼은 아니지만, 이 밴드를 대표하는 만만찮은 명곡이다. 보컬 Steve Perry의 시원시원한 절창은 오히려 이 곡에서 더 잘 드러난다.
나의 사춘기를 채워주었던 밴드. 모범생이었던 내게 <The Return of N.EX.T part Ⅰ, Ⅱ> 연작 앨범은 세상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해준 최초의 계기였다. 그만큼 앨범 전체에 사회성 짙은 가사와 신해철의 작가주의적 세계관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 이 곡은 그중 몇 안 되는 발라드로서 제목처럼 이상주의자들의 영원한 송가다. 곡에서 등장하는 ‘그녀’는 신해철의 어머니다. 대마초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는 중에 눈물 흘리는 어머니를 보면서 만든 곡이라고 한다. 신해철은 <길 위에서>, <그저 걷고 있는 거지>, <민물장어의 꿈> 등 아티스트로서 삶의 자세를 성찰하는 곡들을 종종 냈는데, 이 곡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1980년대 <스잔>으로 유명했던, 아이돌의 조상님 김승진의 밴드. 2003년 나온 이 곡은 말 그대로 원히트 원더다. 당시에는 꽤 히트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멜로디가 아름답고 편곡도 유려하여 록발라드 명곡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1990년대 가요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일본 밴드. 이들이 미친 영향은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를 모두 갖는다. 좋은 의미는 한국적 마이너 발라드의 작법에 영감을 주었다는 것이고, 나쁜 의미는 그 작법이 표절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는 것. 윤상, 윤종신, 유정연, 유희열 등 이 밴드의 영향이 느껴지는 뮤지션은 정말 한둘이 아니다. 특히 록발라드에 상당한 장기가 있었고, 그 정수를 이 곡에서 그대로 느껴볼 수 있다.
우리나라만큼 록발라드가 인기 있는 나라가 일본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일본 록밴드들은 스피디하고 강렬한 록사운드를 내세우면서도, 감성적인 발라드도 주요 레퍼토리로 갖고 있다. 젊은 층의 지지를 받는 이 밴드도 마찬가지다. 피아노로 잔잔히 시작해서 오케스트라로 빵 터뜨리는 편곡이 돋보인다. 물론 전형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록발라드 특유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치트키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