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개월인 딸은 여느 아이들처럼 동요를 좋아한다. 평소 나는 집에 있거나 운전할 때 늘 음악을 튼다. 그러면 딸은 “아빠 노래 말고 서우 노래 틀어줘!”한다. 그럼 여지없이 듣던 음악을 핑크퐁 동요 모음으로 바꿔야 한다. 딸은 특히 끈적한 바이브레이션이 물결치는 R&B나, 기타와 드럼 사운드가 강렬한 록을 싫어한다. 결국 이런 음악은 딸이 자는 심야에 이어폰으로 들어야 한다. 그러면 마치 고3 야간자율학습 때로 돌아간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올드팝은 잠자코 듣는다. 올드팝이 뭔가 동요처럼 들리는 걸까? 딸이 항의하지 않으니 나도 점점 올드팝을 듣는 비중이 늘고 있다. 원래 내 음악 취향은 케케묵기도 했다. 오래된 질감의 로파이, 빈티지한 사운드를 좋아한다. 이런 취향에 맞는 올드팝을 몇 곡 소개해보려 한다. 집에 아이들이 있는 구독자분들은 함께 들으셔도 좋겠다.
Carpenters, <Yesterday Once More>
1970년대를 수놓은 이지리스닝 팝의 최강자. 참으로 편안하고 감미롭다. 듣고 있으면 세상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름에서 보듯 카펜터라는 성의 남매 밴드다. 카렌 카펜터의 청아한 보컬과 리처드 카펜터의 서정적인 송라이팅이 황금 밸런스를 이룬다. 레전드 록밴드들이 활개 쳤던 1970년대에 활동해서 그런지, 소프트한 음악을 했던 이 팀이 저평가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대중성의 매력은 오직 이 팀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곡은 이런 장점이 잘 드러나는 이들의 대표작이다. 제목, 가사, 멜로디, 편곡이 부드럽게 녹아들며 듣는 사람의 향수를 아련하게 자극한다.
Luther Vandross, <Dance with My Father>
제목부터 딸과 들으라고 만든 노래 같다. 이토록 로맨틱한 제목과 멜로디라니. 사실 2003년에 나온 곡이라 올드팝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곡의 저변에 흐르는 정서가 딱 올드팝스러워서 그냥 골랐다. 어린 시절 함께 춤을 추곤 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가사에서는 향수보다는 슬픔이 느껴진다. 아마 이 노래를 발표하고 얼마 되지 않아 타계한 가수 루더 밴드로스의 안타까운 삶이 겹쳐져 더 그럴 것이다. 밴드로스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인기 있는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러나 R&B의 GOAT를 꼽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절대고수다. 1970~80년대 미국 R&B에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두는 나얼이 존경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Barry Manilow, <Mandy>
고급스러운 사운드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한껏 조화를 이루며 귀르가즘을 선사한다. 피아노가 대중음악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지리스닝의 교과서 같은 곡이다. 확실히 여자 이름을 제목으로 쓰는 곡들은 다 로맨틱한 것 같다. 이 곡 말고도 Toto의 <Lea>, Boston의 <Amanda>, Europe의 <Carrie> 등이 떠오른다. 1975년 빌보드 1위에 올랐던 히트곡이지만, 2003년 Westlife가 리메이크하면서 또 한 번 인기를 누렸다. 역시 좋은 곡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Commodores, <Easy>
제목 그대로 이지하다. 기분 좋은 그루브, 간질간질 로맨틱한 보컬, 세련된 멜로디가 조화롭다. 정말 국내 가수들이 구현하기 힘든, 버터 풍미 가득한 아메리칸 사운드라고 생각한다. 가사에 ‘sunday morning’이 반복되어서 그런지, 일요일 아침에 들으면 더욱 분위기가 산다. 이 그룹의 보컬 라이오넬 리치는 솔로로 독립하면서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동시대 활동한 루더 밴드로스와 함께 남자 R&B 보컬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스타일과 음역대는 확연히 다르다. 일례로 리치가 부르고 밴드로스가 리메이크한 <Hello>를 들어보라. 둘 다 엄청난 명곡인 건 매한가지인데, 느낌은 희한하게 서로 다르다.
John Denver & Placido Domingo, <Perhaps Love>
내가 알고 있는,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곡.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가사도 참 시적이다. 곡의 주제인 사랑은 남녀 간의 연정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정서로서 의미화된다. 그런데 이 곡은 컨트리 가수와 성악가라는 특이한 듀엣이 불렀다. 1981년에 나왔는데, 이때만 해도 성악가가 팝 음악을 한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때에 세계 3대 테너라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이 곡을 뜬금없이 내놓은 셈이다. 이게 대박이 터지면서 크로스오버가 음악 장르로서 본격화되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팝페라의 조상님 격인 곡이다. 우리나라에도 아주 비슷한 곡이 있다. 이동원과 박인수가 부른 <향수>다. 들어보면 대놓고 이 노래를 롤모델로 삼고 만들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The Beatles, <I Will>
불멸의 GOAT 밴드 비틀스의 곡. 사실 그들의 커리어를 가득 채우는 히트곡은 아니다. 폴 매카트니가 여행 중에 가볍게 만든 소품과도 같은 곡이다. 길이도 짧고, 편곡도 단출하고, 가사도 평범하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아이와 함께 듣기에 좋다. 마치 동요 같은 팝송이다.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의 1994년 영화 <Love Affair>에도 나온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명장면으로 가득한 로맨스 영화의 고전이다. 여기서 유치원 선생님 역을 맡은 베닝이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율동과 함께 가르치는 장면이 있다. 베닝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정말 너무너무 귀엽다. 아직 안 보셨다면 꼭 보시길. 그래서 난 이 노래하면 비틀스보다는 영화 <러브 어페어>가 먼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