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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Nov 17. 2023

29년 만의 우승 축하곡

사실 나는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팬이다. 며칠 전에 한국시리즈 우승한 그 팀 맞다. 못할 때는 내색 안 하다가, 우승하니까 이렇게 정체를 드러낸다. 내가 생각해도 기회주의적이다. 브런치에도 야구 글은 한 번도 안 썼었다. 그저 친한 작가님들과의 댓글 대화에서 슬쩍 엘밍아웃했을 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야구썰을 풀면 최소 매거진 한 두 개는 발행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다른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야구 글은 아주 나중에나 쓰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글을 안 쓸 수 없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지구 멸망할 때까지도 안 될 줄 알았던 이 저주받은 팀이, 29년 만에 통합우승을 하는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LG의 마지막 우승은 1994년, 내가 중2 때였다. 1994년과 2023년, 이게 얼마나 엄청난 차이인지 감이 오는가? 딱 세 가지 지표만 언급하려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1994년 김영삼, 2023년 윤석열이다. 초등의무교육기관은 1994년 국민학교, 2023년 초등학교다. 그해 최고 히트곡은 1994년 칵테일 사랑(마로니에), 2023년 I AM(아이브)이다. 번외 편으로, 군 복무 기간은 1994년 26개월, 2023년 18개월이다(…).     


그래서 이 우승을 기념하는 곡들을 골라 보았다. 육아 때문에 한국시리즈를 거의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마지막 5차전은 볼 수 있었다. 회사에서 야근하면서 폰으로. 고우석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는 순간,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결국 눈물이 났다. 훌쩍훌쩍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꺼이꺼이로. 덩치 큰 40대 아재가 사무실 구석에서 그러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가 못 본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감격의 순간 떠오른 노래들이다.     




Bee Gees, <You Win Again>

     

5차전의 여운이 가라앉기 전에 가장 먼저 들었던 곡이다. 또 한 번 이기기(win again)가 이리도 힘든지 몰랐다. 1994년 우승 당시에도 LG는 최강팀이었다. 주전도 다 젊었고 무엇보다 팀의 짜임새가 좋았다. 선발, 불펜, 타선, 수비가 모두 시스템화되어 있었고 어느 곳 하나 구멍이 없었다. 따라서 이제 LG 왕조가 시작될 것임은, 아무리 야알못이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우승하기까지 29년이나 걸릴 줄이야. 아마 당시 LG팬들에게 “님들 다음 우승은 29년 뒤임. ㅇㅋ?” 이랬으면, 미친 X 취급당했을 게다. 근데 설마 다음 우승도 29년 뒤는 아니겠지? 그럼 나 70대 할아버지 되는데...

     

1987년 나온 이 곡은 비지스에게도 의미가 남다르다. 1970년대 전성기 뒤에 찾아온, 1980년대의 침체기를 끝내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빌보드 차트에서는 별 반응 없었지만, 영국 차트에서 1위를 했다. 쿵쿵 울리는 리듬에 합을 맞추는 신시사이저 연주가 웅장한 느낌을 자아낸다. 여기에 비지스 특유의 달콤한 보컬과 희망찬 가사가 포근히 더해진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긍정적인 기운이 전해진다. 오랜 암흑기를 겪고 재기한 비지스와 LG 트윈스의 스토리가, 곡의 메시지 – You Win Again - 와도 잘 어울린다.    


Whitney Houston, <One Moment in Time>


프로야구는 10개 팀이 참여한다. 그래서 산술적으로는 10년에 한 번 우승이 돌아온다. 물론 “산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현실은 다르다. LG처럼 29년 만에 우승하는 팀도 있고, 롯데처럼 31년째 우승 못 하는 팀(@슈퍼피포 작가님 죄송;;)도 있다. LG는 마지막 우승이 그나마 김영삼 정부 때였지, 롯데는 무려 노태우 정부 때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밥 먹듯 우승한 두산, 삼성, SSG 팬들은 절대 모른다. 우승이란 인생에서 맞는 한 번의 소중한 순간(One Moment in Time)임을.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이 곡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가로 쓰였다. 민족의 자랑 코리아나 성님들의 <손에 손잡고>가 있는데 뭔 소리냐고? 미국은 그냥 지네들이 이걸 주제가라고 멋대로 정해버렸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도 곡이 워낙 좋아서(…) 용서가 된다. 가사와 반주도 딱 인류 대화합 송의 느낌이 난다. 이 노래를 들으며, 응원 팀의 우승이 인생에서 얼마나 기억될만한 순간인지, 새삼 깨닫는다.


Queen, <Under Pressure>

     

생각해보면 LG의 암흑기가 왜 그리 길었는지 미스터리다. 빅마켓 팀으로서 지원도 빵빵했고, 유망주들도 솔찬게 잘 모았고, 무엇보다 팬들의 열성적인 지지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 오랜 세월을 못 했으니, 정말 논리와 이성을 벗어나는 일 같았다. 그래서 혹자는 2002년 준우승을 하고도 잘린 김성근 감독의 저주라고도 했었다. 저주 드립 외에 그럴듯한 해석은 선수들의 멘탈 문제라는 것이었다. 팬들의 기대는 큰데 성적은 안 나오고, 그러니 선수들이 부담감을 느끼고, 이게 다시 성적 저하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이걸 선수들이 인증하기도 했었다. 암흑기의 절정이었던 2011년, 빡친 팬들이 시합 후 청문회를 열었고, 거기 불려 나온 박용택이 변명이랍시고 한 말이 이거였다. “솔직히 저희 선수들 너무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응원을 해줘도 부담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팬들은 더 빡쳤다. 그리고 안 그래도 별명 부자였던 박용택은 이날 부담택, 졸렬택이라는 별명을 추가했다(…).

     

그때는 나도 이 따위로 배때지가 부른 팀은 더 이상 응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야구를 안 볼 것도 아닌데. 이미 20여 년 응원해 온 팀, 마치 물린 주식 강제 장투하듯,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응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29년 만에 그 부담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만약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지기라도 했으면, 뭔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났을 것이다. 그만큼 압박스러운 경기들이었을텐데, 끝내 극복해내서 자랑스럽다. 그들에게 퀸의 이 명곡을 바치고 싶다. 부담스럽고 힘든 상황에서도 끝내 웃는 자가 1류라며.

     

넬, <시간의 지평선>

     

1994년, 중2 때 뭘 하고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내 학창 시절 대부분이 그랬듯 아마 평범한 날들이었을 게다. LG가 우승하는 그 순간은 TV 중계로 지켜봤다. 너무 좋아서 옆에 있던 (아무 생각 없던) 동생을 꽉 끌어안았다. 당시 나는 LG 에이스 이상훈의 팬이었다. LG라는 팀을 30년 넘게 응원하고 있지만, 특정 선수를 좋아한 건 그 양반이 유일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가 내 지론이지만, 이상훈은 단 하나의 예외였다. 좌완 투수인 그를 너무나 흠모했던 나머지, 동네 야구를 할 때도 왼손으로 던졌던 기억이 난다. 오른손잡이 중학생이 왼손으로 던지면 어찌 되는지 아는가? 공이 포수 글러브까지 가지도 못하고, 바로 앞 땅바닥에 패대기 쳐진다(…).

     

넬의 이 곡은 마스터피스다. 가사가 특히 그렇다. 하긴, 넬의 곡 중에서 후진 가사를 찾기가 더 어렵다. 저 멀리 지나온 옛 시절을 회상하는 아련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넬의 가사를 전담하는 김종완은 (까칠한 인상과 달리) 의외로 과거지향적 인간인 듯하다. 가사에서 그런 정서가 묻어 나온다. 이 곡 말고도 <미련에게>, <Home>, <청춘연가>, <오분 뒤에 봐> 등이 그렇다. 특히 이 곡은 29년 세월의 지평선을, 1994년의 영광을 되새기며 힘겹게 건너온, LG팬들을 위한 송가와도 같다.

     

김현철, <오랜만에>

    

이번 LG 우승에 이것만큼 잘 어울리는 노래 제목이 또 있을까. 비단 LG뿐만 아니다. 올해는 한미일 프로야구 우승팀들이 다 그랬다. 유독 오래 우승 못했던 저주 걸린 팀들이 한을 풀었다. 미국의 텍사스 레인저스, 일본의 한신 타이거스, 한국의 LG 트윈스. 이 세 팀이 그동안 우승 못한 해를 더하면 무려 128년이 된다(…). 그러니 김현철의 이 노래와 잘 어울린다. 아니, 단지 “오랜만에”로 퉁치기에는, 한 세기가 넘는 그 눈물겨운 세월이 길고 무겁다.

     

이 곡은 한국 가요 올타임 명반으로 꼽히는 김현철 1집의 첫 번째 트랙이다. 약관의 김현철은 이 데뷔앨범으로 ‘포스트 유재하’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얻었다. 다만, 그 이후로 이 앨범만큼 임팩트 있는 뭐가 안 나와서 그렇지...;; 내가 기억하는 김현철은 윤상과 함께 한국 시티팝의 원류다. 이 곡에서도 그 도회적이고 쿨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주현미의 <짝사랑>이 최고 인기곡이었던 1989년에, 이런 세련된 작법의 퓨전재즈라니, 김현철이 천재이긴 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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