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는 밸런스 게임이다. 원곡의 고유성과 신곡의 창의성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아야 한다. 고유성을 유지하되, 최소한의 창의성은 더해야 한다. 이걸 잘못하면 와르르 밸붕이 일어난다. 고유성에 무게를 두면 리메이크의 의미가 없어진다(“이럴 거면 리메이크를 왜 했어?”). 창의성에 방점을 찍으면 명곡의 아우라를 해칠 수 있다(“이 곡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래서 리메이크곡은 좋은 평가를 얻기 힘들다.
하지만 감히 원곡보다 좋다고 할 수 있는 리메이크곡들이 있다. 이제부터 소개할 곡들이다. 듣다 보면 무슨 서커스 같다. 이런 느낌이다. 고유성과 창의성이라는 두 기둥이 우뚝 서 있다. 둘을 팽팽한 줄이 잇는다. 그럼 아티스트가 그 위에 올라가서 거침없이 뛴다. 텀블링도 하고 막 춤도 춘다.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들은 굇수들의 대향연이기도 하다.
서태지, <내 모든 것>
한때 서태지를 싫어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빠가 까를 만든다” 1990년대 가요의 뉴웨이브는 뛰어난 프로듀서들 – 서태지, 신해철, 정석원, 윤상, 김현철, 이현도 등 – 이 주도했다. 그런데 유독 서태지만 어나더레벨로 인정되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뭔 서태지로부터 1990년대 음악이 시작된다는 식의 해석에 반감이 들었다. 음악 천재(?)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서태지는 스페셜 원이 아니라, 원 오브 뎀이라는 게 당시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인정했다. 서태지는 천재 맞다고. 결정적 계기가 이 곡이었다. 이 <내 모든 것>은 원래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수록곡이다. 타이틀곡 후보였다가 막판에 <난 알아요>에 밀렸다(그래서 B면 첫 곡으로 갔다). <난 알아요>와 비슷한 랩댄스 곡인데, 사운드가 좀 더 부드럽고 멜로디라인이 두드러진다. 이걸 2014년 'Quiet Night' 콘서트에서 록으로 다시 편곡했다. 셀프 리메이크이긴 하지만, 내가 아는 모든 리메이크 곡을 통틀어 가장 뛰어나다. 프로듀서로서 서태지의 가장 뛰어난 역량은 편곡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곡에서는 그런 편곡 귀신 서태지의 천재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일단 도입부부터 리스너를 압도한다. 기타와 신시사이저가 만들어내는 장엄한 인트로는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자극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곡의 시그니처인 “빠바바바바빠바밤빠”(이렇게 개떡같이 썼어도 찰떡같이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가 터져 나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팔뚝질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이 곡은 멀쩡한 사람도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마력이 있다. 또한 원곡의 유려한 멜로디라인을 헤비한 록사운드와 절묘하게 배합시켰다는 점도 대단하다. 원곡의 멜로디는 오히려 발라드로 바꾸는 게 어울려 보인다. 근데 그걸 완전히 역으로 가서 심장을 후드려패는 록사운드로 재탄생시킨 거다. 어쩜 이렇게 두 상반된 요인이 하나의 음악 형식에서 조화롭게 녹아드는지. “대립적인 것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다”라고 했던 양자역학의 대부 닐스 보어도 울고 갈 편곡이다.
아무튼 이 명곡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건 뮤지션 서태지의 음악 역정을 응축하는 곡일지도 모르겠다고. 원래 록커였던 서태지는 현실적 고려에 따라 댄스 뮤지션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뒤에 다시 본류인 록으로 돌아갔다. <내 모든 것>의 편곡이 보여주는 음악적 진화(랩댄스 → 록사운드)도 이와 꼭 닮았다.
김진표, <샴푸의 요정>
군대에서 우연히 들었던 곡이다. 아직 쫄병이라 24시간 각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는 단숨에 내 귀로 날아와 꽂혔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여기가 군대라는 사실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가 <피가로의 결혼>을 트는 장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쫄병 신분에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일단 가사와 멜로디를 최대한 기억해 두었다. 외박 나가면 찾아서 들어볼 요량으로. 그렇게 첫 외박 때 간신히 이 곡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는 래퍼 김진표. 나는 힙합을 안 들어서 김진표라는 래퍼를 잘 몰랐다. 그저 <달팽이>를 부르는 이적 옆에서 색소폰이나 부는 쩌리 멤버쯤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 그루브 넘치는 곡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니! 힙합의 필수 요소인 라임도 이 곡으로 처음 알았다. 힙알못인 나는 “오오오 이거시 라임이라는 거구나. 완전 찰지다@0@”하며 감탄했다.
둘째는 레전드 빛과 소금. 이 곡의 원곡자다. 나름 가요를 듣는다고 들었는데, 빛과 소금이라는 밴드는 이때 처음 알았다. 알고 보니 저 유명한 아티스트 크루, 동아기획의 일익을 담당했던 팀이었다. 요즘은 이 팀을 한국 시티팝의 원류로 소개한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시티팝이라는 용어가 없었다. 대신 이런 음악을 퓨전재즈라고들 했었다. 적당히 흥겨운 리듬에, 공간감이 두드러지는 미니멀한 악기 배치, 도회적인 느낌의 세련된 연주가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곡은 빛과 소금의 퓨전재즈 스타일을 김진표가 힙합으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상다반사 작가님에게도 댓글로 쓴 내용이지만, 원곡은 상당히 미니멀하다. 악기 구성도 소규모고, 편곡도 단출하며, 곡의 전개도 사뿐사뿐(?)하다. 그런데 김진표 버전은 여기에 리듬감과 래핑을 실어서 묵직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이뿐만 아니다. 김조한과 이준의 폭풍 피처링이 더해지면서 곡의 질감도 훨씬 풍성해졌다. 이건 뭐 전성기 솔리드의 공방업 버전(- 정재윤, + 김진표)라 해도 좋겠다.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퓨전재즈 명곡이 흑인음악 색채가 듬뿍 가미된, 현대적 초명곡으로 재탄생하였다.
백예린, <산책>
리메이크를 논하는 데 백예린이 빠질 수 없다. 백예린은 흔히 말하는 “니 노래 내 노래” 스킬의 최강자다. <드래곤 볼>의 캐릭터 셀이랑 비슷하다. 셀은 다른 생명체의 에너지와 기술을 흡수해서 파워업한다. 에네르기파는 기본이고 원기옥까지 쓸 줄 안다. 백예린도 그렇다. 어떤 곡이든 백예린이 흡수하면 원래 그녀의 곡처럼 느껴진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역시 그녀의 음색 덕분일 것이다. 내가 아는 우리나라 가수 중에 가장 음색이 유니크하고 또 아름답다. 그리고 다양한 감정의 결을 세밀하게 표현해낸다. 록, 발라드, R&B, 포크, 재즈 등 장르 불문 전천후다. 백예린의 커버곡 영상에 달린 댓글이다. “모든 노래를 백예린 버전으로 바꿔주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 완전 공감한다. 나는 백예린이 야구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면 어떨지도 궁금하다. 백예린이라면 애국가도 쿨하고 세련된 시티팝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산책>의 원곡은 그리 유명하지 않다. 아마 나 포함해서 백예린의 커버로 알게 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원곡은 소히라는 가수가 불렀다. 다만 작곡자는 유명한데, 바로 불독맨션의 이한철이다. 백예린의 리메이크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예쁜 멜로디, 청아한 피아노 연주, 그 위에 사뿐히 얹어지는 그윽한 보컬이 조화롭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세상 모든 시름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흔히 힙합에서 멋진 무대에 ‘찢었다’는 표현을 쓴다. 나는 외려 이 아름다운 발라드에 그 표현을 쓰고 싶다. 짧은 피아노 전주 후 “한적한 밤, 산책하다 보면”하고 백예린이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말 그대로 찢었다.
김필, <다시 사랑한다면>
김필도 백예린 못지않은 음색 장인이다. 어지간한 막귀도 김필의 목소리는 듣는 순간 구분할 것이다. 그래서 이 양반도 커버 곡에서 상당한 강점을 발휘한다. 다만 백예린과 달리 본인 히트곡은 많지 않다. 이건 개인적으로도 안타깝게 여기는 부분이다. 김필의 음색을 좋아해서 그의 신곡이 나올 때마다 들어본다. 그런데 희한하게 귀에 꽂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냥 음색만 좋다. 아마도 싱어송라이터로서 대중성이 부족해서인듯하다. 커버 곡이나 본인 곡이나 안 가리고 빵빵 터뜨리는 백예린과 비교하면, 좀 아쉽다.
그러다 보니 이 <다시 사랑한다면>이 김필의 대표곡이 된 것 같다. 사실 이 곡은 정식 리메이크 음원이 아니다. 김필이 <복면가왕>에 출연해서 불렀는데, 그마저도 경연에서 탈락한 뒤에 팬서비스로 부른 곡이다. 그러나 곡이 워낙 출중해서 결국 입소문을 탔다. 김필의 우수 어린 음색과 원곡의 서정성이 만나서 아주 그냥 핵분열을 일으켰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나하아아아아”(또다시 개떡같이 썼지만 찰떡같이 이해해주시기를)하는 공기 반 소리 반의 부분은, 김필이 아니면 도저히 이렇게 잘 살릴 수 없을 것 같다.
이 곡은 작사-작곡 콤비도 엄청나다. 가사는 강은경이 썼다. 1990년대 박주연과 함께 쌍벽을 이뤘던 여성 작사가다. 헤어진 사랑을 기억하는 아프고 복잡한 심경을, 역설적인 표현을 주로 씀으로써 애절하게 드러냈다. 곡은 이 분야(록발라드) 끝판왕 김태원이 썼다. 마치 15년 뒤에 김필이라는 가수가 부를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쓴 듯하다. 둘이 이렇게 잘 어울릴 거면, 김필이 부활의 보컬을 맡아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스탠딩 에그, <그대 돌아오면>
스탠딩 에그는 인디신에서 꽤 고정팬을 갖고 있는 팀이다. 2010년 데뷔이니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다. 비슷한 시기 등장한 에피톤 프로젝트, 스웨덴세탁소, 제이레빗, 커피소년 등과 함께 이지리스닝 인디음악을 대표한다. 나는 2016년 이들의 공연을 보고 나서 팬이 되었다. 소극장이기는 했지만, 문화예술의 불모지 대전에서 평일에 만석이 되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메인보컬인 에그 2호(정형돈을 닮았다)의 감미로운 미성이 이 팀의 시그니처다. 그래서 귀에 꿀을 바르는 듯한 힐링송, 고막남친송에서 엄청난 내공을 보여준다. 사실 앨범들을 쭉 들어보면 생각보다 스펙트럼이 넓은 팀이다. 고도의 편곡이 가미된 모던록이나 애시드재즈 같은 장르에도 일가견이 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아무래도 가볍고 편안한 러브송이 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대 돌아오면>에도 이 팀의 시그니처가 잘 살아있다. 원래는 박소이거의 일원이자 가창력 대마왕인 거미의 곡이다. 원곡은 거미 특유의 허스키한 음색과 호소력 넘치는 보컬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스탠딩 에그의 리메이크 버전은 그보다는 부드럽고 아련한 느낌이 강조되었다. 사실 앞의 네 곡과 달리, 이 곡만큼은 원곡보다 확실히 낫다고는 말 못하겠다. 다만 ‘Sung by 거미’가 인장처럼 새겨진 이 R&B 명곡을, 정통 발라드 감성으로 재해석한 스탠딩 에그의 시도도 꽤 흥미로워서, 마지막으로 소개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