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1년 2개월이 걸렸다. 책의 본문을 탈고하여 지난주 출판사에 넘겼다. 원래 6개월을 기약하고 시작한 작업이었다. 예상보다 두 배 이상 길어진 셈이다. 과거 신해철, 이석원 같은 뮤지션들이 앨범 발매를 밥 먹듯 늦출 때마다 욕했었다. 저거 괜히 있어 보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라며. 내가 비슷한 입장이 되어보니, 이제 그 심정을 이해하겠다. 내 작품을 세상에 내놓다는 게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이다. 어떻게든 완성도를 높이고 싶은 마음에, 이미 다 된 결과물을 하염없이 붙잡게 된다. 이 말도 안 되는 작업 지연을 믿고 기다려준 출판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원고 자체는 이달 초에 거의 완성되었다. 그런데 책이란 게 글만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본문에 들어갈 그림을 구하고, 설명을 덧붙이는 작업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림은 글의 이해를 도와주면서, 저작권도 문제없는 것이어야 했다. 이런 그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또한 본문 외의 보조 문장들을 다듬는 데도 애를 먹었다. 예컨대 인용 출처 표기를 통일하는 것, 각주에 적합한 내용을 본문에서 빼서 정리하는 것, 소제목의 톤과 분량 밸런스를 맞추는 것, 등등이다. 이 작업까지 마무리하고 나니, 비로소 그냥 원고가 아니라 체계를 갖춘 책처럼 보였다.
책의 콘셉트는 두 가지다. “누구도 과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와 “외부에서 관계를 통해 과학을 이해한다”. 이 두 가지 생각을 가장 근본에 두었다. 그리고 이 생각을 구현할 소재들을 구했다. 과학은 물론, 역사, 철학,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에서 영혼까지 끌어모았다. 그럼으로써 독자에게 - 과학과 아무 연관 없는 문과생이어도 - 과학과의 흥미로운 접점을 만들어주고자 했다. 문장은 평이하게, 물 흘러가듯 쓰려고 노력했다. 과학 글은 무조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문장 때문에 더 이해 안 되는 사태만큼은 막고 싶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듬”이라는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다. 다행히 교열을 본 에디터 선생님이 내 글은 비문이 없어서 고칠 게 거의 없다고 하셨다. 적어도 문장만큼은 1차 테스트를 통과한 듯하다.
본문은 4부로 구성했다. 과학과 상호작용해온 역사적 요인들을 네 개로 나누어 배치했다. 사상과 철학, 정치와 권력, 경제와 산업, 의료와 건강. 이것들이 각각 1, 2, 3, 4부가 된다. 사상과 철학을 1부로 한 이유는, 그것이 가장 근본이 되는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현대과학의 기원인 16세기 과학혁명도 철학적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근본이 되는 원리를 이해해야만, 그 위에 올려진 구조를 파악하기가 쉬운 건 당연하다.
그런데 출판사가 이 구성에 반대했다. 대신 의료와 건강, 정치와 권력, 경제와 산업, 사상과 철학 순으로 하자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1부를 맨 뒤로 돌린다는 것이다. 출판사는 1부가 이 책의 마케팅 포인트와 안 맞는다고 보았다. 출판사에서 내세우려는 콘셉트는 이런 것이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과학책”, “이 책 1권이면 과학의 주요 흐름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1부의 주제들 – 지동설, 기계론, 뉴턴역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 – 은 너무 무겁고 난해하다. 자칫 시작부터 독자를 질리게 할 수 있다는 게 출판사의 우려였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가벼운 주제들부터 내세우자는 것이다.
사실 나로서는 1부를 가장 공들여 써서 이 제안이 마뜩찮았다. 과학적 사유의 저변에 흐르는 논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출판사의 입장도 이해는 되었다.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닌 교양서다. 그리고 출판사 말마따나 내가 작가로서 어필할만한 배경이 없는 이상, 철저히 책의 콘셉트로 승부를 봐야 하는 것도 맞다. 브런치에 올린 초고들에서도 출판사의 지적과 유사한 현상이 드러났다. 2, 3, 4부보다 1부에 들어갈 글들에 대한 라이킷과 댓글 수가 현저히 적었던 것이다. 결국 출판사의 제안에 동의했다. 확실히 전문가들이라서 보는 눈이 다르다고 느꼈다. 목차를 바꾸면 책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출 수 있다. 다만 과학에 접근하는 논리적 단계가 엉킨다는 우려는 여전히 있다.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다음 주쯤 최종본에 디자인을 입힌 파일이 올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새로운 목차에 따라 서사를 일부 조정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면서 전체적인 서술 톤도 맞춰야 한다. 본문 못지않게 중요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도 써야 한다. 이미 어느 정도는 써두었다. 다만 출판사가 정하는 콘셉트에 따라 다시 써야 할 수도 있다. 책 제목은 출판사가 정할 듯하다. 가장 궁금하면서도 걱정되는 부분이다. 이 출판사는 인문학 교양서도 제목들이 다 심상치 않다. 저런 제목으로 책을 내도 잘 팔린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출판사에서는 몇 개의 제목(안)을 정해 나와 상의하겠다고 한다. 제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류의 제목만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출판사 요청에 따라, 그간 브런치 <사회 속의 과학 이야기> 매거진에 올렸던 책의 초고는 발행 취소했다. 아마 몇 달 뒤에나 재발행할 것 같다.
본문을 탈고한 뒤, 난장판이 된 서재를 정리했다. 쓰면서 참고했던 책과 자료들이 그 좁은 공간 곳곳에 흩어져 있다. 다시 그러모아서 책장에 넣으려 했다. 그러자니 뭔가 아쉽다. 그래도 이 힘든 과정을 나와 함께 버텨온 동지들 같아서. 한 권씩 집어서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당시 마주했던 고민, 내 생각이 틀렸음을 확인했을 때의 낙담, 원하던 내용이 퍼즐처럼 맞춰졌을 때의 쾌감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책장에 넣으려던 책들을 다시 책상 위에 쌓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공연이 끝난 뒤, 전 스태프가 무대에 모여 기념 촬영하는 느낌으로. 나는 그렇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섬으로써 인생 첫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내가 책을 쓸 수 있게 기꺼이 어깨를 내준, 모든 거인 선배들께 감사한다.
참고가 된 책들. 도서관에서 빌린 책과 출력한 논문까지 더하면 이보다 몇 배는 많다. 다 담지 못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