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대웅 Nov 25. 2023

나의 레어템 자랑 (2)

feat. 서재

몇 달 전 <나의 레어템 자랑>이라는 글을 올렸었다.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그날따라 갑자기 자랑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소장 중인 레어템들을 골라 자랑글을 썼다. 책, 피규어, 음반의 3종 세트였다. 근데 글을 쓰고 보니, 자랑한 소장품들이 그다지 레어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하여 망글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또 자랑글을 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책을 쓰느라 난장판이 된 서재를 며칠 전 대청소한 것이다. 꼬박 하루가 걸려 깔끔해진 서재를 혼자 보기 아까웠다. 그래서 이걸 자랑하기로 했다. 이 깨끗한 상태는 길어봐야 2주이므로, 기록으로 남길 필요도 있었다. 사실 서재를 아이템이라고 하기는 뭐하다. 하지만 레어한 건 맞는 듯하다. 지인 중에 이런 공간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건 순전히 아내 덕분이다. 아내가 예전부터 넓은 집으로 이사 가면 서재를 만들어주겠노라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집으로 와서 정말 방 한 칸을 서재로 주었다.(원래 더 큰 방이었지만, 애 태어나고 제일 작은 방으로 쫓겨난 건 안 자랑)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쓰는 서재를 자랑해보려 한다. 이 글을 읽을 유부남 동지들에게 자극이 되길 바란다. 여러분이 아내를 졸라 서재를 얻어낼 수 있다면, 작가로서 글 쓴 보람을 느끼겠다.


우선 전체적인 생김새는 이렇다.

위쪽이 문을 열면 보이는 모습, 아래쪽은 안쪽으로 들어와서 본 모습. 작은 방 가운데에 책상과 의자가 있다. 책상 위 노트북은 상당히 허접해 보이지만, 그래도 저걸로 책 한 권을 썼다. 그리고 의자 뒤로 15칸짜리 책장이 ㄱ자 모양으로 둘러싼다. 책상 앞쪽으로는 나의 덕후력을 체현하는 애장품들이 있다. CD, 피규어, 야구공 등등. 요것들은 마지막에 사진으로 자세히 보여드리겠다. 일단 이 공간은 서재이므로, 책들부터 소개해보려 한다.

가장 안쪽 구석 위층, 만화 구역에 있는 만화책들. 인생 원탑 만화 『H2』와 『소년탐정 김전일』 세트가 있다. 『소년탐정 김전일』 은 저 뒤로 시즌 2까지 다 있다(@슈퍼피포 작가님 김전일 시즌2 망작 아님요). 『H2』는 한번 사두면 죽을 때까지 볼 것 같아서, 제일 비싼 소장판 세트로 구입했다.

문 옆으로 있는, 꽤 자주 꺼내는 책들. 세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좌파 / 유럽 역사(시오노 나나미) / 인물 평전 및 미국 경제 /

과학사 및 과학철학 / 유럽 사회민주주의 / 미국 정치 및 역사


시오노 나나미 책들은 몇 년 전 이탈리아 여행갈 때 예습용으로 산 것이다. 근데 사놓고 거의 안 읽었다. 과학사 및 과학철학 책들은 요번에 책 쓰면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다. 유럽 사회민주주의와 미국 자유주의 정치는 한때 학문적 관심사여서 관련 책이 많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주력으로 생각했던 콘텐츠이기도 하다. 반면 과학 글은 자주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출간 제안이 들어와서 브런치 메인 콘셉트가 바뀌었다. 자연히 내 서재에서 과학 책 비중도 그만큼 높아졌다.

그 아래 칸에 있는 책들. 세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사회학 / 사회・정치철학 / 미국 정치

추리(마쓰모토 세이초) / 과학사 / 미국 역사


내 전공이 사회학이니, 관련 책이 많은 건 당연하다. 가난한 대학원생 시절 생활비를 아껴서 산 귀한 책들이다. 다만 꺼내어 읽어본지는 정말 오래되었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마쓰모토 세이초 책도 많다. 이 양반 책들은 대부분 중후하고 선이 굵다. 추리물에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을 수 있다는 것도 이채롭다. 오른쪽 구석에 보이는 『미국사 산책』은 강준만이 쓴 것이다. 기대가 커서 전집을 구매했는데,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반 정도 읽다가 멈춘 상태다.

그 아래 칸의 책들. 여긴 다 추리소설이다. 두어 권 빼놓고 전부 히가시노 게이고 저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추리소설 입문용 작가다. 공장장으로 불릴 정도로 다작한다. 근데 내놓는 작품들의 편차가 꽤 크다. 거의 띵작 아니면 망작으로 극단화된다. 그럼에도 저기 보이는 작품 중에서 『백야행』, 『악의』, 『비밀』, 『환야』,『살인의 문』은 이 양반의 5대 띵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정말 너무너무 재밌다. 범인도 알고 반전도 알고 트릭도 다 아는데도, 가끔 생각나면 읽어볼 정도다.

그 옆 책장의 가장 윗 칸. 왼쪽은 문학, 오른쪽은 마르크스주의. 문학은 거의 안 읽지만, 김훈은 그래도 취향에 맞는 편이다. 마르크스는 한때 진지하게 공부했던 학자다. 꽤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한 번도 내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현대에도 마르크스주의가 유효한 지점은 여전히 꽤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아래 칸의 책들. 왼쪽은 진보학계의 거목들(정운영, 김수행, 황석영, 리영희) 저작, 오른쪽은 자본주의 국가론 연구서들. 자본주의 국가론도 전공으로 삼을지 심각히 고민했던 주제였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다.

그 아래 칸의 책들. 왼쪽은 추리소설 고전들(애거서 크리스티 선집, 셜록 홈즈 전집)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왠지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한 질쯤 있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구입했다. 코너스톤에서 나온 것인데, 가성비 갑이다. 할인할 때 아주 싸게 샀다. 오른쪽은 별 공통점은 없지만, 주로 에릭 홉스봄의 근현대사와 찰스 킨들버거의 경제사 책들. 홉스봄과 킨들버거는 책을 정말 어렵게 쓴다. 그저 호기심만으로는 읽기 힘들다. 책을 읽는 뚜렷한 목적과 강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 아래 칸의 책들. 왼쪽은 그냥 운동권 이념서적들. 예전에 브런치에도 썼던 <공부하는 이유>에서 언급했던, 군복무 시절 열심히 읽었던 책들이다. 제목 폰트만 봐도 핵노잼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지 않는가? 실제로 그렇다. 오른쪽도 뭐 운동권 책이긴 한데, 왼쪽보다는 제도권 느낌이 더 강하다. 주로 진보정당 활동할 때 많이 읽었다. 한때 (지금도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를 우리 사회의 진보적 대안이라 생각했었다. 그걸 실제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책들이다.

다시 위로 올라가서... 왼쪽은 윤소영 교수 관련 책들이다. 이것도 뭐 운동권 책이라고 봐도 되겠다. 윤소영 교수는 오소독스한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양반이다. 워낙 박식해서 그런지, 자기가 최고라는 자존감도 강하다. 그래서 어그로도 엄청나게 끈다. 한국 마르크스주의 최고 석학인 김수행 교수도 이 양반한테 까일 정도다. 하지만 그만큼 논리가 선명해서 책은 재미있다. 오른쪽은 장하준 교수 책들과, 그와 비슷한 문제의식의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책들.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은 인생의 책 중 하나로 꼽는다.

그 아래 칸의 책들. 왼쪽은 세계경제사에 대한 것이다. 주로 주경철 교수 책이 많다. 주경철 교수는 내가 아는 역사학자 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글을 잘 쓰는 분이다. 오른쪽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숙했다고 여기는 최장집 교수와 관련 책들. 아마 이 서재 전체에서 가장 열심히 읽은 책들일 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민주주의론이야말로 현실에 기초하면서도 실현 가능한 진보적 대안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최장집 교수가 스승으로 여기는 로버트 달의 책들도 몇 권 보인다. 두꺼운 책들은 엄두도 못 냈고, 얇은 책들 위주로 읽었다.

그 아래 칸은 고전 코너가 되겠다. 시대를 초월하는 인문사회 고전들이 주로 배치돼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쪽 칸에는 완독한 책이 별로 없다. 그나마 읽은 책들은 뭔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이 칸에 있는 책들만 제대로 완독해도, 교양 수준이 몇 배는 더 높아질 것이다.

그 아래에 다시 나타난 추리소설들. (왼쪽의 강유원, 유시민 저작은 적당한 자리가 없어서 저기에 두었다.) 일본 추리소설의 조상님인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선도 있다. 아직 안 읽어봐서 내용은 모르겠다. 오른쪽 칸의 작가들은 내가 매우 애정하는 이들이다. 누쿠이 도쿠로, 다카기 아키미쓰, 우타노 쇼고. 이 양반 책 진짜 재미있다. 특히 저기 보이는 누쿠이 도쿠로의 『우행록』은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몇 년 전 재발행되면서 국역 제목이 『어리석은 자의 기록』으로 바뀌었다). 트릭이 두드러지는 책은 아니다. 다만 전체적인 느낌이 김기덕 감독 영화와 비슷하다. 뭔가 나도 범죄의 일부가 된 것 같아, 불편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맨 위칸으로 올라가서... 여긴 양쪽이 다 무라카미 하루키 코너다. 사실 난 하루키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이 이 정도 있으면, 하루키스트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난 그의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좋다. 온갖 오컬트적 메타포로 가득한 그의 소설은 읽어도 뭔 의미인지 모를 때가 종종 있다. 반면 사물과 현상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는, 위트 넘치는 에세이는 언제 읽어도 좋다. 특히 여행갈 때 하루키 에세이는 반드시 챙긴다.

그 아랫 칸. 왼쪽은 자유주의 관련 책들이다. 자유주의도 한때 심각하게 공부했던 주제였다. 진보와 보수의 두 측면을 갖는, 자유주의의 양면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당시의 고민이었다. 알고 보니 그 양면성이 자유주의가 역사의 최종 승자가 된 이유였다. 어떤 정치적 입장과도 결합 가능한 그 유연함 덕분에, 이념에 위기가 닥쳐도 쉽게 자기 혁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은 역시 과학 관련 책들이다. 이번 책 작업에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 아랫 칸, 정치경제 관련 책들인데, 공통점은 별로 없다. 이쪽 책들도 모아놓기만 하고 별로 읽지 않았다. 석사학위 논문 주제가 기술관료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 관계였다. 그래서 논문 준비하면서 민주주의 관련 책들은 최대한 많이 모았던 것 같다. 이거 다 언제쯤이나 읽을지 모르겠다.

그 아랫 칸, 키 작은 책들도 꽤 샀다. 크고 두꺼운 책이 부담스러울 때는 가끔 저런 책도 읽고 싶더라. 다만 작고 얇다고 책 내용까지 만만한 건 아니다. 중간에 보이는 『자유론』은 근대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는 사상을 담은, 아주 중요한 책이다(그래서 @세온 작가님도 이 책을 진지하게 리뷰하셨다).

마지막 칸, 추리소설이 다시 나왔다. 이 칸에 명작들이 꽤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도 누쿠이 도쿠로의 『우행록』만큼이나 필독서다. 사회파 장르의 최고봉인 작품이다. 추리물로서도 뛰어나지만,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탐구하는, 묵직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증명 3부작 - 『인간의 증명』, 『야성의 증명』, 『청춘의 증명』 - 도 사회파의 손꼽히는 명작이다. 이 작가는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좌파 성향이다. 그래서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화를 비판하는 작품들을 많이 썼다. 증명 3부작에도 평화주의자, 휴머니스트로서의 성향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책 소개는 여기까지다. 다음은 내 덕후력의 산물, 애장품이다.

미국의 맥팔레인이라는 회사에서 출시한, MLB 선수들 피규어. 몇 년 전까지 미친 듯이 사모았다. 정확한 개수는 세어보지 않았지만, 100개 넘을 것 같다. 가격은 만 원대부터 30만 원대까지 다양하다. 정말 디테일 쩔지 않은가? 이 피규어들에 대한 이야기로도 브런치 매거진 한 두 개는 너끈히 쓸 것이다. 난 얘들을 볼 때마다 결혼 잘했음을 느낀다. 이런 취미를 이해해주는 여자는 정말 흔치 않다.

CD들. 원래 이것보다 몇 배는 많았다. 빌려줬다가 못 돌려받고, 이사하면서 잃어버리고 등등해서 이것만 남았다. 주로 JPop 음반이 많다. 예전에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못 들었기 때문(지금도 다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이다. 제일 많은 건 역시 가장 애정하는 미스터 칠드런 음반들. 그 외에 U2, 데이브 매튜스 밴드, 콜드플레이 등의 음반도 꽤 된다.

야구공들. 난 외국에 가면, 그 도시 홈팀의 공을 기념으로 사온다. 그 외에 출장이나 여행가는 지인들에게 부탁해서 얻은 공들도 있다.

그 아래 칸의, 또 하나의 인생작인 『슬램덩크』. 『슬램덩크』는 판본이 여러 개인데, 이건 신장재편판이다. 타케히코 이노우에가 전집을 새로 내면서 표지 일러스트를 다시 그린 버전이다. 근데 나도 어쩔 수 없는 덕후인가 보다. 이걸 갖고 나니, 1990년대에 보았던 오리지널 판도 갖고 싶어진다. 신장재편판이 깔끔해서 좋긴 한데, 옛날 그 레트로한 느낌은 또 안 난다(...). 그 옆에는 또 하나의 인생작 『크로스게임』이 있다. 몇 년 전 사놓고 아직 뜯지도 않았다. 그 아래에는 인생 드라마 <웨스트윙>의 DVD 세트가 있다. 요즘 DVD를 누가 보나. 말 그대로 소장용이다. 이걸 보려면, 딸아이가 쓰는 (주로 영어학습 영상을 보는) DVD 플레이어를 빌려야 한다.


이 정도면 레어하지 않은가? 여러 번 언급하지만, 이 공간은 아내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 애 키우면서 집에 이런 공간을 내주는 (+저런 요상한 취미를 이해해주는) 아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은 레어템 자랑이었지만, 결론은 아내 자랑으로 맺어도 될 것 같다. 여보 고마워♡

매거진의 이전글 원고 최종본을 넘기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