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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Dec 22. 2023

원곡보다 좋은 리메이크곡들 (2)

며칠 전 발행한 글이지만, 또 한다. 한 번으로 끝내기는 아쉬워서. 세상에 좋은 리메이크곡들이 그만큼 많다. 생각 같아서는 한 10편까지 연재하고 싶다.



      

김현철, <연극이 끝나고 난 후>

     

1989년 1집을 낸 김현철에게 붙은 별명은 ‘천재’였다. 데뷔와 동시에 이런 별명을 얻은 이는 강백호, 아니 유재하 말고는 없었다. 그만큼 김현철 1집의 감성은 세련되었고 작법은 시대를 앞서나갔다. 문제는 2집부터는 딱히 그렇지 못했다는 것(…). 김현철은 포스트 유재하에서 수많은 발라더 중 하나가 되어 갔다.

 

하지만, 5집의 이 리메이크곡을 한번 들어보라. 원곡은 1980년 대학가요제에서 샤프가 부른 <연극이 끝난 후>다. 당시 가요에서 드물었던 소울, 펑크 리듬 기반의 흑인음악이었다. 발표 직후에도 인기가 있었으나, 수많은 후배가 커버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김현철 버전은 그중 갑 오브 갑이다. 그가 천재로 불린 이유를 이 커버가 증명한다. 원곡의 펑키한 그루브를 아주 그냥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킬링 포인트는 두 가지다. 먼저 브라스 편곡. 김현철은 내가 아는 가요 뮤지션 중에 브라스 사운드를 가장 잘 다룬다. 이 곡에 그 특유의 다이내믹스가 잘 살아있다. 둘째는 낯선사람들의 피처링. 이소라와 고찬용이라는 걸출한 보컬을 배출한 재야 고수답게, 재지하고 감각적인 하모니를 들려준다. 이 두 요소를 적절히 배합해서 원곡의 정서를 배가시킨, 김현철의 프로듀싱 능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더 클래식,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역대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가수는 아마 유재하일 것이다. 그만큼 그가 남긴 단 한 장의 앨범은 강렬했고 후대에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그런데 또 워낙 자주 커버되다 보니, 여간해서는 귀에 잘 와닿지 않는다. 웬만하면 그냥 “응, 또 유재하구나”하고 말게 된다.


그러나 더 클래식의 이 리메이크는 다르다. 수많은 유재하 리메이크 중에 군계일학이다. 원곡이 레전드인 이유는 팝 발라드로서 극강의 세련됨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더 클래식은 거기에 데뷔곡 <마법의 성>에서 보여준 순수함과 서정성을 고스란히 덧댄다. 위에서 극찬했던 김현철의 편곡이 그 가교 역할을 했다. 세련된 멜로디에 서정적인 보컬 및 연주가 사뿐히 얹어지니, 이보다 더 매력적일 수 없다. 참으로 맑고 영롱한 곡이다.

     

조규찬, <나는 그리움 너는 외로움>

     

한국 대중음악의 노래 천재를 꼽는다면 조규찬이 빠질 수 없다(@일상다반사 작가님이 이 문장을 좋아합니다). 보컬리스트 조규찬의 장점은 정말 한둘이 아니다. 그중 단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다재다능함’을 꼽겠다. 발라드는 기본이고 록, 재즈, R&B, 댄스까지 안 되는 게 없다. 그 폭넓은 장르를 소화하면서도 또 ‘조규찬’이라는 시그니처를 꽝 하고 새겨버린다. 이러한 역량은 리드싱어보다는 서포터의 역할을 맡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재즈곡을 부를 때 보여주는 스캣과 애드리브는 진기명기 수준이다. 그가 없으면 가요계에서 백보컬과 코러스를 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닌 이유다.


그런 조규찬이 리메이크 앨범을 냈으니, 이건 또 얼마나 좋겠는가. 역대 리메이크 앨범의 최고봉인 나얼의 <Back to the Soul Flight>에 필적할만하다. 그중 이 <나는 그리움 너는 외로움>은 박영미의 원곡을 모던록 스타일로 바꿔 불렀다. 박영미는 한국의 셀린 디온이라는 별칭답게 노래를 파워풀하게 부른다. 이걸 노래 천재 조규찬은 훨씬 더 리듬감 있고 세련되게 재해석했다. 특히 막판에 펼쳐지는 미친 애드리브가 이 곡의 백미다. 흔히 말하는, “노래를 가지고 논다”는 표현에 조규찬만큼 어울리는 가수도 없다.

     

정엽, <나비 효과>

     

원곡은 신승훈이 불렀다. 한 시대를 풍미한 발라드 황제 신승훈의 이름값에 비하면, 많이 알려진 곡은 아니다. 사실 나는 신승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시그니처인 뽕삘과 신파가 영 별로다. <보이지 않는 사랑>, <널 사랑하니까>,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으로 이어지는 밀리언셀러 발라드 라인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런 나도 예외적으로 좋아하는 신승훈 곡이 두 개 있다. <Polaroid>와 바로 이 곡이다. 이 곡들을 들어보면, 그가 생각보다 훨씬 감각적인 뮤지션임을 새삼 깨닫는다.

 

다만 이 곡의 핏은 정엽에게 더 맞는 듯하다. 그가 왜 한국의 맥스웰(물리학자 말고 R&B 가수)로 불리는지 이 곡에서 고스란히 증명한다. 원곡의 감미로움이 정엽의 음색과 만나니, 어느 하나 더하고 뺄 곳이 없다. 마치 명품 맞춤 정장(나도 입어본 적은 없지만) 같다. 정엽의 음색에 딱 떨어지게 맞춘, 고급스러운 양복 핏처럼 느껴지는 곡이다.

     

윤미래, <행복한 나를>

     

남자들에게 <고해>가 있다면, 여자들에게는 <행복한 나를>이 있다. 그만큼 두 곡은 노래방 간지 절창 발라드의 양대산맥을 이룬다. 원곡자 에코는 TLC를 벤치마킹한 듯한 여성 R&B 보컬 그룹이었다. 물론 곡 스타일도 퍼포먼스도 TLC에는 한참 못 미쳤다. 냉정히 말해 에코는 원히트 원더다. 그러나 이 명곡을 남겼다는 것만으로, 가요사에 기억될 가치가 있다.


원곡이 워낙 웰메이드라 많은 후배가 리메이크했다. 아마 허각과 김예림 버전이 제일 유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윤미래 버전을 최고로 꼽는다. 사실 윤미래는 R&B 가수보다는 래퍼로 분류하는 게 맞을 것이다. 업타운으로 데뷔했을 때, 그녀가 보여준 본토 느낌 물씬 나는 랩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듯, 윤미래도 노래라면 뭐든 다 잘 부른다. 아마 트로트도 잘 부를 게다. 발라드라고 예외일까. R&B가 뭔지 한 수 가르쳐주는 듯한 윤미래의 소울풀한 재해석은, 원곡의 아름다운 멜로디에 풍성한 질감을 더한다.

     

범키, <난치병>

     

‘뮤지션들의 뮤지션’이라는 표현이 있다. 대중성보다 작품성으로 더 인정받는, 리스너보다 동료들이 리스펙하는 뮤지션을 뜻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윤상일 것이다. 나는 여기에 하림도 추가하고 싶다. 사실 하림은 가수로서 많은 곡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자기 앨범은 2개밖에 안 된다. 그러나 작곡가, 프로듀서, 세션, 공연기획자, 심지어 민중가수로서 보여준 그의 스펙트럼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제3세계 음악에 대한 진지함 탐구는, 그가 정말 음악 자체를 추구하는 구도자와 같은 뮤지션임을 보여준다.


이 <난치병>은 같은 앨범의 <출국>, 다음 앨범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와 함께 하림을 대표하는 명곡이다. 다만 소위 히트곡은 아니다. 대중보다는 오히려 후배 뮤지션들이 더 좋아하는 듯하다. 이 곡도 오디션에서 금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연에서 많이들 부른다. 그만큼 수많은 커버 버전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범키의 버전이다. 들어보면 아주 그냥 음색으로 씹어먹는다. 범키와 비슷한 보컬 라인(?)으로는 자이언티, 딘, 크러쉬, 콜드 등이 있다. 그러나 힙합과 랩도 오가는 이들과 달리, 범키는 R&B에 더욱 특화된 느낌이다. 모난 사람의 마음도 무장해제시킬 듯한,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그의 음색은 <난치병>의 커버에 최적의 조건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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