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나는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었다. 한창 유행에 민감할 나이에도 또래들과 관심사가 달랐다. 친구들이 오락실과 게임에 열중할 때, 나는 『삼국지』나 『초한지』 같은 역사소설을 더 좋아했다. 드라마도 트렌디 드라마보다는 사극을 즐겨 봤다(아재요...ㅜ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올드스쿨 콘텐츠가 취향에 잘 맞았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중2 여름방학으로 기억한다. 여러 학교 연합으로 수련회(?)를 갔었다. 남녀 학생들을 한 조로 몰아넣는 탈유교적 방식 때문에 관심들이 지대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내가 대표로 갔다. 한창 드라마 <느낌>이 히트하던 때였다. 남녀가 모인 곳마다 대화 주제는 “손지창, 김민종, 이정재 중 누가 제일 매력적이냐?”였고, OST인 <그대와 함께>는 대회 주제가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나는 이 드라마를 몰랐다는 것(그래서 여친이 안 생겼나;;). 당시 내 워크맨에서 줄창 돌아가던 곡은 시카고의 <Hard to Say I’m Sorry>였다. 그때 기준으로도 흘러간 옛 노래였다.
이런 취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해보려 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즐겨 듣는,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팝록의 명곡들을. 흔히 록음악이라고 하면, 시끄럽고 비대중적이며 반사회적이라는 인식이 있다. 물론 헤비메탈이나 펑크록은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록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다. 팝록 또는 소프트록이라 불리는 경향은 오히려 정반대다. 기본적으로 록밴드의 편성을 취하지만, 비트보다 멜로디가 두드러지고, 로맨틱한 사운드가 돋보이며, 기타 못지않게 키보드의 비중도 높다. 이런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면 록부심 충만한 근본주의자들에게 무시당하기 딱 좋다. 근데 뭐 어쩌겠는가. 좋은 건 좋은 건데.
Chicago, <Will You Still Love Me?>
시카고는 어린 시절의 최애 록밴드였다. 정확히 말하면, 1980년대 데이비드 포스터가 프로듀싱한 곡들을 좋아했었다. 이 팀은 무려 1967년 결성된 만큼, 앨범도 많고 음악적 스펙트럼도 폭넓다. 그런데 1980년대 한정으로 팝록 밴드로 활동했었다. 불멸의 히트곡 <Hard to Say I’m Sorry>가 그 시작점이었다. 원래 재즈 성향이 강했으나, 대중적 감각이 뛰어난 데이비드 포스터가 팀의 프로듀서를 맡으며 스타일도 바뀌었다.
이 곡은 데이비드 포스터가 제작한 시카고의 마지막 앨범 <Chicago 18>에 들어있다. 서정적인 멜로디, 꽉 차는 밴드 사운드, 애절한 보컬이 매력적이다. <Hard to Say I’m Sorry>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딱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록발라드 스타일이라서 그랬을 게다. 수많은 가수를 히트시킨 데이비드 포스터지만, 그래도 시카고와의 궁합이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그 양반 특유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이 팀의 정교하면서도 풍성한 연주력이 참 잘 어울렸다. 다만 둘의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협업한 기간이 4년밖에 안 된다. 시카고 멤버들은 가장 히트곡이 많았던 이 시절(1982~1986년)을 흑역사 취급하며, 공연에서도 잘 안 부른다. 둘 다 좋아하는 나 같은 팬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Starship, <Nothing’s Gonna Stop Us Now>
스타십이라는 밴드에 대해서는 정말 이 곡 말고는 아는 게 없다. 사실 이 곡도 밴드의 오리지널 히트곡이라고 하기는 뭐한 것이, 영화 <마네킹>의 OST 수록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기만큼은 엄청났던 모양이다.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먹었고, 아카데미상의 주제가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 물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마네킹>이란 영화는 본 적도 없이 노래만 주구장창 들었지만 말이다.
이 곡은 이 시대에 유행했던 팝록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쉽고 편한 멜로디, 키보드가 이끄는 감성적인 사운드, 리듬감이 가미된 편곡이 그렇다. 그래서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인데도 신나고 흥겹다. 데이비드 포스터 못지않게 대중적 감각이 뛰어난 다이앤 워런이 작곡했다. 다만 이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다이앤 워런의 곡들은 주로 1990~2000년대(셀린 디온, 토니 브랙스턴, 리앤 라임즈 등등)에 많이 들었다. 그런데 1987년 나온 이 곡도 그녀의 작품이래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작곡가로서 역시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모양이다.
Toto, <Mad About You>
토토는 이 매거진의 ‘연주력 쩌는 밴드들’에서도 소개했었다. 하지만 명곡들이 워낙 많아서 또 소환한다. 이전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이 팀은 연주만으로 귀르가즘을 선사한다. 밴드의 전 포지션이 다 절정 고수들인데, 핵심은 역시 드럼이다. 드럼이 이 팀 특유의 섹시하고 그루브 넘치는 사운드 전개를 진두지휘한다. 드러머의 역량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이 밴드의 곡들이 자주 사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곡에도 드럼의 매력이 잘 살아있다. 드럼이 이끄는 리듬의 향연 위에 각 악기가 화려한 연주를 선보인다. 특히 인트로부터 드럼과 찰진 그루브를 만들어 내는 베이스와, 강렬한 멜로디 훅을 지원하는 기타 연주가 그렇다. 여기에 고음을 질주하는 보컬의 절창이 더해지면서, 곡의 매력이 대폭발한다. 클라이맥스에서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지는 걸 듣고 있노라면, 곡의 제목 – 너한테 미칠 지경이야 – 한번 잘 지었다 싶다.
Boston, <Livin’ for You>
보스턴은 앞서 소개한 시카고와 더불어 팀명을 대충 지은 듯한(…) 밴드다. 멤버들이 보스턴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정했다(우리로 치면, 록밴드 대전이나 인천 같은 느낌이다). 리더 톰 숄츠는 엄청난 엘리트이기도 하다. 무려 MIT에서 학사와 석사까지 마쳤다. 학창 시절에는 명문대를 동경한 나머지, 이런 고스펙 뮤지션을 참 좋아했었다. 공부뿐만 아니라 음악도 잘하니 얼마나 멋진가. 명문대 못지않게 이 팀에 대해 떠오르는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바로 앨범 발매 간격이 무지 길었다는 것. 5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발표한 앨범이 베스트 포함 7개밖에 안 된다. 톰 숄츠가 엔지니어로서 어마어마한 완벽주의자여서 그랬단다.
이 곡은 널리 알려진 히트곡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곡이다. 아주 세련된 편곡의 록발라드로서 보스턴의 주 스타일과는 다르다. 일단 초반에 키보드 전주와 함께 깔리는 나직한 보컬이 인상적이다. 대놓고 이 곡은 빼박 록발라드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곡의 백미는 역시 기타 연주. 나직하게 시작해서 애절하게 치고 올라가는 보컬의 틈을 뚫고, “아싸 이때다!”하며 터져 나오는 기타 솔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Journey, <I’ll be Alright Without You>
<Open Arms>가 워낙 넘사벽이라 그렇지, 저니의 곡들도 좋은 것이 많다. 국내에서는 마치 원히트 원더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안타까울 정도다. 이 팀도 1980년대 팝록 사운드의 한 축을 쌓아 올린 스타일리스트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들어봐도 세련된 고퀄의 사운드가 귀에 확 꽂힌다. 탄탄한 연주력을 바탕으로, 스티브 페리의 절창이 더해지면서 밴드 사운드의 화룡점정을 이룬다. 탁성과 미성의 불가사의한 마력을 지닌 스티브 페리는 별명이 ‘The Voice’일 정도로 엄청난 보컬리스트였다. 저 유명한 마이클 잭슨의 슈퍼 프로젝트 <We Are the World>에도 참여했으니, 말 다 했다.
1986년 발표된 이 곡은 스티브 페리가 마지막으로 부른 앨범에 수록되었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키보디스트 조나단 케인이 스티브 페리가 떠난 팀을 상상하면서 썼단다. 당시 스티브 페리는 솔로 앨범이 대박 나면서 탈퇴가 기정사실이었다. “너 없이도 난 괜찮을 거야”라며 자신을 다독이는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그래서 나올 수 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려는 그대로 실현되었다. 이 앨범 이후 스티브 페리는 정말 떠났고, 저니는 긴 침체기에 들어섰다. 가사와 현실의 역설 덕분에 더 슬프게 느껴지는 발라드다.
Bon Jovi, <Livin’ on a Prayer>
아마도 본 조비의 <Cross Road>는 내가 이제껏 가장 많이 들은 팝 앨범일 것이다. 이 아재들의 전성기가 고스란히 담긴 이 베스트앨범에는 정말 버릴 곡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 시절 록스피릿 넘치는 고딩들 사이에서, 본 조비 좋아한다고 하면 무시당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본 조비의 음악은 록이 아니라 팝이라며. 근데 이거 나름 꾸준히 이어지는 드립이다. 요즘은 콜드플레이가 주로 이런 소리를 듣는 것 같다.
1986년 발표된 이 곡은 <You Give Love a Bad Name>과 함께 본 조비를 대표하는 히트곡이다. 드럼과 키보드가 이끄는 독특한 인트로부터 시작해서, 터프한 사운드가 곡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거기에 과감한 고음을 내지르는 존 본 조비의 보컬은 감성적이기까지 하다. 의외로 이 곡은 정치적인 함의도 담고 있다. 가사를 들어보면 노조가 파업하고, 실직한 노동자가 식당에서 일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힘든 현실에서도 기도하면서 역경을 이겨내자는 게 이 곡의 메시지다. 실제로 리더 존 본 조비는 골수 민주당 지지자로 유명한데,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앨 고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이 곡을 불렀다고 한다. 쌍둥이 적자로 유명했던,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불황에 영감을 받아 쓴 곡이라며. 뭐 그런 정치적인 메시지 다 떠나서, 1980년대 팝록 사운드의 절정을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좋은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