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를 아직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줄은 몰랐다. 며칠 전 ‘추억 돋는 팝록 명곡들’이란 글을 썼는데, 여러 작가님께서 댓글로 시카고를 반가워해 주셨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추억의 곡이라며. 데뷔 60주년을 바라보는, 아재도 아닌 할재급이 된 이 밴드가 여전히 이리 유명할 줄이야. 난 나만 좋아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기쁜 마음에 글 하나를 더 쓴다. 시카고의 곡들만 추려서 더 소개해보려고. 제목은 존경하는 @캐리소 작가님의 댓글에서 따왔다. 어린 시절을 감성으로 채워준 그들의 곡은 내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다. 아마 시카고를 기억하는 모두가 비슷할 것이다.
시카고를 논하는 데 이 명곡이 빠질 수 없다. 그들의 최고 히트곡이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카고 하면 바로 떠올리는 곡일 것이다. 피아노와 현악기가 전면에 나서서, 아름다운 멜로디 및 감미로운 보컬과 화합하는 구성은, 그야말로 세련된 팝발라드의 전형이다.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의 멜로디 메이킹과 편곡 능력이 찬란하게 빛난다. 시카고의 전성기를 이끈 보컬 피터 세트라의 매력이 잘 살아 있는 곡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미성에다, 고음을 내지르면서도 풍부한 음색이 드러나는 그의 목소리는 이런 발라드에 아주 잘 맞는다. 보컬과 곡이 너무 찰떡이라, 다른 누가 커버해도 원곡의 맛이 안 산다. 이 노래는 정말 피터 아재만 불러야 한다.
사실 이 곡의 원제는 <Hard to Say I’m Sorry / Get Away>다. 제목에서 보듯 서로 다른 두 곡이 붙어 있다. 다만 <Hard to Say I’m Sorry>에 이어지는 <Get Away>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1970년대 시카고가 해왔던, 재즈 록 성향이 강한 곡이다. 나는 ‘데이비드 포스터가 프로듀싱한 팝 스타일의 시카고’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싫어했다. 그래서 듣다가 <Hard to Say I’m Sorry>가 끝나면, 짜증을 내면서 워크맨의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나중에 <A Touch of David Foster>라는 앨범을 샀는데, 거기에는 <Get Away> 없이 <Hard to Say I’m Sorry>만 녹음되어 있었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데이비드 포스터의 대표곡만 모은 편집 앨범이라 그랬던 것 같다. 이후에도 난 <Hard to Say I’m Sorry>를 이 앨범 수록 버전으로만 들었다. 너무 좋아하는 앨범이라 CD로도 소장 중이다.
데이비드 포스터가 프로듀서를 맡기 전, 1970년대 시카고의 최대 히트곡이다. 이전까지 시카고는 거친 재즈 록을 주로 했었다. 그러다 피터 세트라가 작곡에 참여하면서 대중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는데, 바로 이 곡에서 바뀐 스타일이 느껴진다. 물론 시카고의 시그니처인 브라스 사운드는 여전히 두드러진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는 발라드이다 보니, 듣기에는 훨씬 편안하다. 특히 현악기와 어쿠스틱 기타가 브라스를 뒷받침하는 사운드 전개가 다분히 올드팝스럽다.
피터 세트라는 이 곡 말고도 <Baby, What a Big Surprise>라는 발라드를 써서 히트하기도 했다. 이런 대중적인 감각이 후일 팀의 프로듀서를 맡는 데이비드 포스터와 잘 맞았던 것 같다. <Hard to Say I’m Sorry>를 비롯한 여러 히트곡이 둘의 공동 작곡으로 탄생했다. 다만 이런 발라드 노선에 불만이 많았던 다른 멤버들과는 갈등을 빚었다. 결국 1985년 시카고를 탈퇴한 피터 세트라는 데이비드 포스터의 프로듀싱으로 솔로 앨범을 내는데, <Hard to Say I’m Sorry>와 비슷한 스타일의 발라드들이 수록되었다. <Glory of Love>라는 곡이 대표적이다.
데이비드 포스터와 피터 세트라 콤비의 또 다른 명곡이다. 도입부에서 벌써 두 사람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러브송에 최적화된, 매우 아름다운 멜로디다. <Hard to Say I’m Sorry>도 러브송이지만 어딘가 쓸쓸한 구석이 있는데, 이 곡은 그런 거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밝고 희망적이다. 사운드 진용의 핵심인 신시사이저가 그런 매력을 아주 잘 살렸다.
이 곡도 중학교 때 <Hard to Say I’m Sorry>만큼이나 즐겨 들었다. 특히 가사 때문에 더 좋아했다. 딱 중학생 수준에서 이해 가능한, 쉬우면서도 예쁜 영어 가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여자친구가 생기면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안 생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카고의 곡이다. 이것도 팝발라드인데, 데이비드 포스터는 편곡과 프로듀싱만 맡았다. 작곡은 스티브 키프너와 존 루이스 파커라는 외주 작곡가들이 했다. 키보디스트 빌 챔플린이 피터 세트라와 같이 노래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미성인 피터 세트라보다 좀 더 거친 빌 챔플린의 목소리가 곡의 질감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빌 챔플린은 몇 년 전 나얼의 솔로 앨범에 참여하면서 화제가 됐다.
이 곡의 매력은 멜로디나 보컬 못지않게 연주에서도 드러난다. 초반은 키보드가 이끌어가지만, 중반부터 여러 악기가 들어오면서 역동성이 살아난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키보드, 브라스, 기타, 드럼이 죄다 투입되어, 두 보컬과 주고받듯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여담이지만 이승환 3집에 <사랑에 관한 충고>라는 곡이 있는데, 시카고의 이 곡을 참고해서 사운드 설계를 한 것 같다. 중학교 때 친구가 권해서 들어봤는데, 바로 “뭐야, 이거 시카고잖아?”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시카고는 이 곡으로 <Hard to Say I’m Sorry> 이후 6년 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등극했다. 현재까지 시카고의 마지막 1위 곡이기도 하다. 1985~86년 피터 세트라, 데이비드 포스터와 차례로 결별한 시카고는 음악적 대전환이 예상되었다. 팀을 이끌던 발라드 콤비가 나갔으니, 본래의 재즈 록밴드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다음 앨범이 나와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보컬과 작곡진만 바뀌었을 뿐, 팝과 발라드를 내세운 스타일은 여전했다. 이쯤 되면 그 둘과 갈등한 이유가 음악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데이비드 포스터 못지않은 히트메이커인 다이앤 워런이 쓰고 빌 챔플린이 불렀다. 이 곡은 당시 유행했던 세련된 팝록 사운드를 들려준다. 특히 기타와 신시사이저가 만들어내는 시원시원한 연주가 일품이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스타일의 연주를 좋아한다. 그런데 왜 이런 장르가 가요에는 별로 없는지 늘 궁금했었다. 대중성도 뛰어나서 잘만 만들면 많이 팔릴 텐데. 부활의 <Lonely Night> 정도가 이런 팝록 스타일을 제대로 구현한 몇 안 되는 곡 같다.
1997년 결성 30주년 기념 베스트앨범에 수록된 유일한 신곡이다. 소개하는 곡 중에서는 그나마 최신곡이다. 너무 1980년대에만 치중한 것 같아, 균형을 맞추는 취지에서 골라봤다. 인기도 나름 있었다.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어덜트 컨템퍼러리 차트에서는 1위까지 했다. 다만 국내에서는 거의 안 알려진 것 같다. 시카고 팬들 사이에서도 이 곡이 회자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느린 템포의 발라드인데도 브라스 편곡의 매력이 돋보인다. 이 곡을 들어보면 “폼은 일시적이나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축구의 명언이 떠오른다. 이 앨범이 나왔을 때 시카고는 전성기도 꺾이고, 주력 멤버와 작곡가들도 많이 떠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밴드로서 팀워크와 연주력이 탄탄하니 여전히 고퀄의 곡을 선보일 수 있었다. 이 곡은 시카고라는 팀이 더 이상 메가히트곡은 못 내지만, 그래도 팬들이 만족할 사운드는 들려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팬으로서 아쉬우면서도, 또 마냥 아쉽지만은 않은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