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대학로는 선망의 장소였다. 그 이름에서 드러나는 학구적인 아우라가 좋았다. 고등학교 때 읽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도 거기에 한몫했다. 이문열의 몇 안 되는 연애 소설인 이 작품은 1969년의 마로니에 교정(지금의 대학로)을 아련한 추억으로 묘사한다. 사춘기의 내게는 참으로 강렬하게 다가온 문장이었다. 나는 그렇게 대전 촌구석에서 대학로에 대한 로망을 키웠고, 대학 입학 후에 직접 가볼 수 있었다.
대학로의 첫인상은 기대에 못 미쳤던 것 같다. 마로니에 공원은 그다지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연극과 공연에 취미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놀 데가 빈약한 학교 앞보다는 크고 번화한 곳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부터는 주말마다 가는 곳이 되었다. 온갖 투쟁과 데모가 거기서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대학로에서 결의대회를 하고, 광화문까지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는 했다. 자연히 그 어디쯤에서 전경들에게 쥐어 터지기도 했었다. 대학로 하면 후덜덜하게 아팠던 기억도 떠오르는 이유다.
2003년 대학로에서 열린 국제반전공동행동의 날 행사에서는 이병헌 배우가 연설을 했다(뉴스 자막에 '연예인'으로 소개된 것이 뭔가 웃기다 ㅋㅋㅋ).
그러다 보니 근본적인 의문도 들었다. 대학로는 왜 대학로일까? 막상 거기에는 대학도 없는데. 물론 인근에 성균관대나 서울대 의과대학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성균관대는 너무 멀고, 서울대 의과대학은 대학보다는 병원이 메인이다. 둘 다 대학로의 상징이라기에는 존재감이 약하다. 적어도 수도 서울의 거리에 ‘대학’이라는 보통명사를 붙이려면, 그보다는 유장한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대학로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서울대 문리과대학이 서울대 의과대학(연건동)의 건너편인 동숭동에 있었다. 문리과대학은 말 그대로 문과와 이과를 합친, 기초학문을 포괄하는 단과대학이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 사회대, 자연대의 전신이다. 요컨대 철학과와 정치학과와 물리학과가 같은 대학에 있었다는 말이다. 문과와 이과가 두꺼운 장벽으로 가로막힌 요즘에는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학제다.
당시 서울대 문리과대학은 곧 서울대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학벌주의의 최정점으로서 다른 단과대학과는 구분되었다. 여기에는 역사적 전통이 있다. 1924년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 장소가 바로 지금의 대학로였다. 제국대학은 일본의 근대화를 견인한 교육기관으로 오늘날 도쿄대학, 교토대학, 도호쿠대학 등의 모태다. 전국에서 선발한 엘리트만 갈 수 있었고 국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아 공부했다. 일제는 이것을 식민지에도 설치했는데, 그때만 해도 국내 유일의 대학이었다. 그래서 이 무렵부터 경성제국대학 인근 도로를 대학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서울대 문리과대학 캠퍼스. 뒤에 보이는 것이 낙산이고, 앞의 도로가 지금의 대학로이다.
해방 후 경성제국대학은 여타의 전문학교들과 함께 국립 서울대학교로 통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이공학부가 서울대 문리과대학으로, 의학부가 서울대 의과대학으로 계승되었다. 서울대의 나머지 단과대학은 이때 통합된 전문학교의 후신이다. 예컨대 공과대학은 경성공업전문학교와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상과대학은 경성경제전문학교를, 사범대학은 경성사범학교를 계승했다. 그러다 보니 캠퍼스도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문리과대학은 동숭동에, 공과대학은 공릉에, 상과대학은 종암동에 있었다. 흔히 서울대를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서울대 문리과대학과 의과대학만 그렇다. 결국 문리과대학의 부심은 경성제국대학의 적통으로서 다른 전문학교의 후예와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엘리트 의식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예시가 서울대 학보 <대학신문>이다. 원래 <대학신문>은 문리과대학의 학보였다. 그 시절에는 <공대학보>, <상대신문>하는 식으로 단과대학별로 학보를 발행했다. 오직 문리과대학만이 학보 제목에 대학이라는 보통명사를 썼다. 이런 식으로 보통명사를 쓰는 위엄(?)은 다른 예에서도 볼 수 있다. 근대 최초의 과학 단체인 런던 왕립학회(Royal Society)는 왕실의 인가를 받기 전 명칭이 그냥 ‘학회(Society)’였다. 마찬가지 이유로 잉글랜드의 축구협회도 국가명 없이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로 표기한다. 이런 사소한 데서도 서울대 문리과대학의 부심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대학신문>은 이제 서울대 전체의 부심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전국 대학의 학보 중에 오직 서울대만 이렇게 보통명사를 쓴다.
학보의 이름이 보통명사 <대학신문>인 곳은 서울대가 유일하다.
1975년 서울대 문리과대학은 큰 변화를 맞았다.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 및 종합화하면서, 문리과대학이 인문대, 사회대, 자연대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반대가 심했다. 일단 세계적으로 문리과대학을 이렇게 나눈 사례가 없었다. 꼭 분리해야 하는 학문적 근거도 부족했다. 권력에 비판적인 운동권에서는 그렇게 해서 학장 자리를 두 개 늘리려는 속셈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서울대 본부는 학문과 교육의 전문화를 이유로 분리를 강행했다. 대학입시의 끝판왕 서울대가 이렇게 하자 나머지 대학들도 따라 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문리과대학은 아주 낯선 이름이 되었다. 그 영광스러운 보통명사를 딴 대학로도 엉뚱하게 “성균관대가 있어서 대학로인가 보다”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그럼 외국은 어떨까? 서울대 문리과대학의 영문 명칭은 ‘College of Liberal Arts and Sciences’였다. 외국에는 여전히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라는 이름의 단과대학이 많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학교들이 대표적이다. 리버럴 아츠는 자유학예로 번역한다. 그러니까 학문과 분야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지식을 뜻한다. 즉 문과든 이과든 누구나 알아야 할 기본교양이자 보편상식이다. 여기에는 흔히 말하는 문사철(인문학)에 자연과학과 예술도 포함된다. 아이작 뉴턴을 예로 들어 말한다면 이렇다. F=ma를 이용해 힘의 크기를 계산해내는 한편, 그가 근대문명사에서 점하는 철학적 의의 – 결정론의 확립이라든가, 이원론의 종합이라든가 – 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버드는 연구중심대학으로 유명하지만, 리버럴 아츠 교육(하버드 칼리지)도 중요하게 여긴다.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가 바로 하버드 칼리지에서 공부했었다.
문리과대학은 없어졌지만, 그 의미는 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융합과 통섭의 시대인 지금에 필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현대 학문의 발전에는 깊이뿐만 아니라 넓이도 중요하다. 기존의 경계를 허물고, 다른 학문 고유의 방법을 원용해야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서울의 유서 깊은 거리 대학로에 쓰인 그 보통명사를 다시 생각해본다. 분야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지식으로서의 ‘대학’을 복원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