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 활동하다 보니 이런저런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그중에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있다. 예컨대 이런 것.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쓰나요?”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내가 그만큼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물론 평균보다야 나을 거다. 하지만 내 글이 남들 앞에서 뽐낼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 어떻게 책까지 냈냐는 반문도 가능한데… 일단 『최소한의 과학공부』는 콘셉트가 좋아서 낼 수 있었던 책이다. 출판사가 추진하던 기획과 내 글의 콘셉트가 부합해서(a.k.a. 아다리가 잘 맞아서) 출간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콘셉트를 빼고 순수한 글빨만 따진다면, 평범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독자의 질문인데, 사실 나 잘 못 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답하곤 한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열망 덕분인 것 같다”라고. 이건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자기계발서 같은 소리는 아니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열망이 강할수록, 어떻게 해야 글을 더 좋아지게 만들지 늘 고민하게 된다. 그럼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본다. 크게는 서사 구조와 문단 배치부터, 작게는 문장 흐름과 단어 선택까지 꼼꼼히 신경 쓰게 된다. 내 글에 대한 검열(?) 기준도 엄격해진다. 그런 시도들이 긴 시간 꾸준히 쌓인다. 자연히 글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나는 고등학교 때만 해도 글쓰기가 두려웠다. 오죽하면 입시 때 논술이 무서워서 특차 모집(수능 100%)하는 대학에 지원할 정도였다. 무조건 특차에 붙어야 한다는 생각에 하향 지원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논술 시험 안 보는 것만으로 만족이었으니. 그만큼 글쓰기란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전환점은 대학 때 있었다. 어느 날 선배들이 내 글을 보고 칭찬해줬다. 내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고 했다. 평생 칭찬을 별로 들어본 적 없었던 내게, 이건 예사롭지 않은 계기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기 시작했다. 필요만 충족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더하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누가 시키거나 보상이 주어져서 든 마음이 아니었다. 그건 순수한 ‘열망’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때부터 글을 쓰는 일상을 계속하게 되었다. 대학의 학생회에서 글을 쓰는 과업은 죄다 내게 주어졌다. 정세분석, 자료집, 선언문, 결의문, 대자보 등등. 그걸 졸업하고 대학원에 갔다. 글쓰기 프로들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원은 정말 글을 잘 쓰지 않고서는 배겨날 수 없는 곳이다. 특히 내 전공인 사회학 교수님들은, 어찌나들 예민하신지 부적절한 개념어를 쓰기만 해도 불호령을 내렸다. 수업 중에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직장에 가서도 이런 일상은 계속되었다. 과학기술 연구소에서 정책기획 업무를 하게 됐는데, 이건 90%가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다. 매년 수백 페이지의 보고서를 썼다. 기본 업무 이외의 글쓰기도 꽤 했다. 이를테면 높으신 분들의 기고문, 발표문, 인사말, 답변서 등등. 가끔 예전 업무 폴더를 열어 보면, 이런 건 언제 썼지 싶은 글도 튀어나와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대학부터 회사까지 글쓰기 생활을 하면서도 최초에 품었던 열망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내 글을 좀 더 나아지게 하고 싶다는 마음. 대자보든 학위논문이든 보고서든 원장님 신년사든, 뭘 써도 이 마음이 글쓰기의 시작과 끝이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글을 쓰는 데 들이는 공력과 고민이란 남들은 다 알 수 없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건 내 글에 내가 만족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내 글의 최종 심급 독자는 바로 나다.
『최소한의 과학공부』는 이 모든 것이 연습이 되어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이 내 글쓰기의 완성은 아니다. 출간 후 반년이 지난 지금, 다시 책을 펼치면 아쉬운 문장들이 눈에 띈다. 왜 이것밖에 못 썼을까, 이건 더 재밌는 소재와 연결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후회스럽지만 마냥 창피한 일은 아니다. 이게 결국 다음 책을 만드는 원동력이 될 테니까. 대학 신입생 때부터 내 글은 늘 그런 열망에 따라 조금씩 나아져 왔으니 말이다.
오래전 김성근 감독이 <GQ>라는 잡지와 인터뷰한 적이 있다. 아주 긴 인터뷰였는데, 특히 다음의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야구 이야기지만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내 글쓰기도 이럴 수 있기를 바란다.
“타자는 3타수 1안타를 치면 3할을 쳤다는 데 그치지 말고 3타수 2안타에 대한 아쉬움을 느껴야 한다. 10타석 중에 7타석을 못 쳐도 3할은 넘는다. 그때 안타를 때리지 못한 7개 타석에 대해 고민하는 타자가 좋은 타자다. 3할 이상을 치는 타자도 좋은 피처에게 못 치는 경우는 약한 타자다. 그것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한다. 포크볼을 못 쳤다, 슬라이더를 못 쳤다고 하면 그것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거다. 투수 역시 마찬가지다. 피처 역시 몸쪽이 안 들어간다 싶으면 그것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그런 연구를 통해서 타자를 하나하나 압도해 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