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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16. 2024

야구의 추억

나를 야빠로 만든 건 아빠였다(라임 쩖). 이 땅의 수많은 소년들처럼 나도 아버지의 꼬임에 빠져 야구에 입문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만 해도 꽤 비쌌던 야구 장비들을 선뜻 사주셨다. 그래서 동네에서 포수 미트가 있는 아이는 내가 유일했고, 덕분에 동네 야구 대표로도 종종 선발되었다. 아버지는 복잡한 경기 룰도 자세히 가르쳐주셨다. 머리가 그다지 좋지 못해서 이해하는 데 좀 걸렸지만, 어느 정도 알고 나니 야구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이때만 해도 나는 롯린이였다. 당시 롯데 직원이었던 아버지의 응원팀이 자이언츠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빠가 롯데 응원하니까, 너도 롯데 응원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주입했지만, 돼지바와 대롱대롱을 즐겨 먹던 나는 당연하게 그걸 받아들였다. 1988년의 일이다. 그때 나의 최애 선수는 4번 타자 ‘자갈치’ 김민호였다. 롯데에는 안경 쓴 레전드가 둘 있는데, 투수는 최동원, 타자는 김민호다. 만화 『H2』에 “안경 낀 포수는 조심해야 한다구”라는 명대사가 나온다. 김민호는 아쉽게도 1루수였다. 4번 타자 치고는 한 시즌 홈런 20개도 못 쳤지만, 뭐 그때 프로야구는 다 (장종훈의 시대 이전이라) 그랬다.

     

문제는 이놈의 롯데가 못 해도 너무 못했다는 것. 이 문장을 쓰고 나니 그 유명한 제리 로이스터 취임사 짤이 떠오르는데… 얼마나 못 했냐면, 체감상 중계를 볼 때마다 지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아빠 땜에 롯데 응원하는데 이게 뭐야! 힝ㅠ” 그럼 아버지는 시즌은 길다며, 남자가 한두 번 지는 거에 일희일비하는 거 아니라고 훈계했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최소 포스트시즌에는 가야 그것도 납득을 하지. 포시도 못 가는데 시즌을 길게 보든 짧게 보든 뭔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1989년, 롯데는 대망의 꼴찌를 했다.

롯데 로이스터 감독 취임사의 뿌리를 찾으려면,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결국 강팀을 응원하고 싶었던 나는 1990년에 팀을 갈아탔다. 무적 LG 트윈스로. LG를 고른 이유는 서울 연고팀에 줄무늬 유니폼이 멋있어서(…) 근데 야구도 잘했다. 창단 첫해인데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다. 김태원, 정삼흠, 김용수의 정상급 투수진에 윤덕규, 노찬엽, 김상훈, 김동수 등 신구조화 타선이 가미된, 짜임새가 좋은 팀이었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내가 엘빠질을 30년 넘도록 하게 될 것과, 그중 10년은 포시 구경도 못하는 암흑기로 채워질 줄 말이다.

     

야빠질을 하면서 야구장도 자주 갔었다. 특히 1991년의 대전구장과 1992년의 전주구장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이때의 강렬했던 경험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일단 그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야구장 분위기를 스케치해보겠다. 1990년대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던 시대다. 그런 만큼 야구장도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우선 시설이 구렸다. 요즘 야구장, 특히 최근 신축한 곳들은 거의 MLB 수준이다. 창원 NC 파크, 대구 라이온즈 파크 등이 대표적이다. 이곳들과 비교하면 강남 한복판의 잠실야구장이 후져 보일 정도다. 그럼 1990년대 야구장은…? 일단 벽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그리고 복도를 지날 때마다 찌린내(?)가 났다. 그 냄새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데, 어디서 났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관람 문화는 더 구렸다. 사실 시설보다도 이게 더 문제였다. 요즘 야구장 관객의 주류는 여성팬과 가족 단위 팬이다. 올스타전 하프타임 공연을 아이돌, 그것도 남자 아이돌이 할 정도다. 하지만 1990년대의 야구장은 가족이나 연인들이 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90% 이상을 아재들이 독점했다.

1990년대 야구장의 90%였던 아재팬들


이 아재들의 특징을 몇 가지 정리해볼 수 있다. 일단 경기 시작 무렵에는 점잖다. 옷도 단정하고. 근데 5회쯤 되면… 어느새 웃통을 까고 난닝구(?) 차림으로 바뀌어 있다. 그와 더불어 술 냄새가 진동한다. 그 시절 야구장 하면 떠오르는 냄새가, 복도의 찌린내와 관중석의 술 냄새다. 그때만 해도 야구장 앞에서 대놓고 소주를 팔았었다. 아재들은 옹기종기 모여 1회부터 그걸 마시는데… 이건 나의 목격담인데, 아이스박스에서 회를 꺼내서 소주랑 먹는 아재들도 있었다.

위의 아재팬들이 술 좀 드시면 이렇게 변하심


그러다 홈팀이 지면, 취한 아재들이 들고일어나 쌍욕을 시전했다. 대상에 예외는 없다. 선수는 물론, 감독과 심판까지, 어머니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패드립이 난무했다. 반대로 이기면? 그때부터는 페스티벌이다. 아마 임영웅이 온대도 그렇게 흥분시키지는 못할 거다. 응원가 떼창(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불러서 잘 안 들림)은 기본이다. 팬티만 입고 응원단장 자리에 올라가 정체불명의 댄스를 추는 아재도 있었다. 그러다 주위에 나 같은 어린 팬들이 보이면, 과자랑 음료수랑 오징어도 한 움큼씩 쥐어줬다(“임마임마 이거 블써부터 롯데 응원하고 마 싹수가 보이네~ 이 다 무라!”). 야구란 일희일비의 스포츠이긴 한데, 이 아재들만큼 그 간극이 안드로메다급이었던 팬들도 없다.


심하면 가끔 난투극(…)도 벌어졌다. 이건 뭐 설명이 필요 없다. 다음의 짤들을 보면 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던 1990년대의 야구장.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야구장에 간 게 딱 이런 때였다. 1991년의 어느 날, 대전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 vs 빙그레 이글스의 경기였다. 빙그레 선발투수는 한용덕이었고, 롯데는 기억이 안 나는데… 박동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경기는 롯데가 (웬일로) 일찌감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포수 뒤편 지정석에서 보고 있었는데, 3루 내야석에는 소수의 롯데 응원단이 있었다. 쪽수는 적었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일사불란한 군무의 포스가 지렸다. 그걸 보던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충청도 사람들이 양반은 양반이야. 저렇게 응원하는 거 다른 데서는 상상도 못해.”

     

아버지는 충청도 야구팬들의 성숙한 의식이 자랑스러웠나 보다. 그런데… 다음 회에 점수가 더 벌어지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3루 내야석에서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다. 빙그레 아재팬들이 롯데 응원단에 쌍욕을 시전하며 뭘 마구 집어던졌다. 물론 소수 정예 롯데 응원단도 지지 않고 맞섰다. 하지만 다구리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롯데 응원단은 결국 외야로 쫓겨났다. 아버지가 충청도 양반 드립을 한 지 30분도 안 되어서였다(…).

    

1992년 여름의 전주구장도 잊지 못한다. 그때 전주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나와 동생을 야구장에 데려가셨다. 롯데 자이언츠 vs 쌍방울 레이더스의 경기였다. 쌍방울 선발투수는 좌완 에이스 박성기였는데, 롯데는 기억 안 난다. 이때도 롯데가 초반에 앞서나갔다(그러고 보니 롯데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다ㅋㅋㅋ). 홈팬들이 모인 1루 내야석에서는 당연히 분노와 좌절의 술판이 벌어졌다. 그런데, 쌍방울이 야금야금 추격하다가 마침내 역전의 기회가 왔다. 그러자 반쯤 누워서 욕을 하고 있던 전주 아재들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양후승! 양후승!” “아 XX 양후승 대타 내라고!!” “아오 감독 저 XX 뭐해?”

    

난 양후승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아재들 말을 들어보니 그전 경기에서 역전타를 쳤었던 모양이다. 근데 그 순간 정말 대타로 양후승 선수가 나왔고, 주자 일소 역전 2루타를 날렸다. 이미 만취한 아재들은 열광의 도가니탕이 되었다. 뭔가에 그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어른의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갓 태어난 나를 처음 안았을 때도 그런 표정은 안 지었을 것 같다. 그때였다. 존 레논과 닮은 장발의 안경 아재가 갑자기 응원단장석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더니 마이크도 없이 고래고래 연설을 했다. 취해서 혀가 잔뜩 꼬부라진 소리라 나로서는 해독 불가였다. 그런데 그 연설을 듣던 관중석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오면서, 응원 구호가 바뀌었다.

     

“플레이 플레이 김대중! 플레이 플레이 김대중!”(…)

     

이거 100% 실화다. 그해 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경기장은 호남의 한복판 전주였으며, 상대 팀은 PK를 대표하는 롯데였다. 실제로 지역감정이 살벌했던 시대였다. 일례로 당시 아버지 차 번호판이 전북이었는데, 서울만 오면 도로에서 자주 시비 털렸었다. 나는 정치는 1도 몰랐던 국민학생이었지만, 그 광란의 응원 광경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32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요즘도 야구는 즐겨본다. 다만 딸아이 때문에 TV로는 못 보고 폰으로 잠깐잠깐 보는 정도다. 그마저도 아내가 별로 안 좋아한다.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와서…;; 생각해보니 어릴 때 야구장에서 봤던 아재들이랑 지금 내 나이가 비슷할 것 같다. 이제는 야구장 문화가 정말 많이 바뀌었다. 질서정연해짐은 물론, 우중충하던 분위기도 산뜻해졌다. 만약 옛날 아재들처럼 추태를 부렸다간 영구 추방될 수도 있다.

     

다만 야구장은 잘 안 가게 된다. 나는 혼자 조용히 맥주 흡입하면서 보는 걸 좋아하는데, 엠프도 시끄럽고 죄다 자리에서 일어나 응원가와 율동을 따라 하는 분위기가 부담스럽다. 물론 과거를 미화할 생각은 없다. 예전 관람 문화가 너무 저질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가끔, 정말 아주 가끔은, 찌린내와 술 냄새가 진동하던 1990년대 야구장이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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