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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ug 23. 2024

딸의 배신

윤종신(2000), <잘했어요>

딸이 다니는 직장 어린이집에 꽤 만족한다. 위치도 사무실 바로 옆이고, 개원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시설도 좋다. 그중 킬포는 넓은 잔디밭과 짙은 녹음. 아파트 어린이집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직장이 연구소라서 외국 아이들도 많다. 딸의 반에도 그리스와 인도에서 온 아이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한국 아이들이 영어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외국 아이들이 한국어를 하게 된다는 것ㅋㅋㅋ 딸과 친한 그리스 아이는 날 보면 “삼촌 방방 태워주세요!”라고 한다(…). 또 선생님들도 헌신적이고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나는 애사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딸이 어린이집에서 잘 지내는 걸 볼 때마다, 자신을 반성하곤 한다.

     

얼마 전에는 어린이집에서 흥미로운 체험을 했다. 이름하여 <지하철 타고 서점 방문>!! 말 그대로 지하철을 타고 시내 대형서점에 가서 책을 사보는 활동이었다.

이 참신한 기획을 하신 선생님께 라이킷 백만 개 드리고 싶다.


공지를 본 아내와 나는 딸이 아빠가 쓴 책을 직접 사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책이야 집에 몇 권은 쌓여 있고, 딸도 그게 아빠가 쓴 건지 안다. 하지만 서점에 진열된 아빠 책을 스스로 골라서 사보는 건 의미가 다르지 않을까? 친구들 앞에서 “이거 우리 아빠가 쓴 책이야~”라고 한마디 하면 어깨도 으쓱할 것 같고. 그래서 아내와 나는 전날 딸을 앉혀놓고 가스라이팅(?)을 했다.

      

“서우야, 내일 어린이집에서 서점 견학 갈 텐데, 꼭 아빠 책으로 사야 해? 아빠 책 이름이 뭐지? 그래그래 『최소한의 과학 공부』. 역시 우리 서우 똑똑해. 서점 사장님에게 꼭 그 책 달라고 해^^”

     

혹시 몰라 어린이집에 저자 사인본을 기증하며 미리 부탁도 했다. 사실은 이거 내가 쓴 책인데, 서우가 이번에 직접 사보면 좋은 경험이 될 테니 도와달라며. 선생님들도 신기하고 재밌어하면서 그러겠다고 약속하셨다. 견학 날 아침에는 딸이 가장 아끼는 티니핑 지갑에 만 원짜리 두 장을 고이 넣어두었다. 이걸로 준비는 끝.


하지만 딸은 역시 시키는 대로 하는 상명하복형 인재가 아니었다. 견학이 끝나고 선생님이 보내준 알림장 내용은 이러했다.

이게 상대가 되겠나… 아무리 아빠 책이어도 포켓몬은 못 참지ㄷㄷㄷ


하긴 3살 아이에게 “볼 것 많은 요즘 어른을 위해 핵심 요약한 과학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짧고 쉬운 초압축 과학사!”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포켓몬스터가 킹왕짱이지. 포켓몬스터는 아무도 못 이긴다고 정신승리를 해본다.

아내와의 카톡… 그래도 이 배신자가 마지막까지 고민은 했구나…


집에 온 실용주의자 딸은 아빠 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자기가 고른 포켓몬스터 한글 공부를 막 자랑한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잘했다고 해줬다.

      

딸의 배신(?)에 씁쓸해하면서, 오래전 좋아했던 노래가 떠올랐다. 윤종신의 <잘했어요>. 윤종신 특유의 이별 후에 찌질거리는 가사가 돋보이는 곡이다. 이 곡이 수록된 8집 <헤어진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노래로만 채워져 있다(앨범 제목만 봐도 아주 작정을 했다). 이걸 딸 때문에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아무튼 서우야, 책 사온 거 참 잘했어요.


그대 잘 산다고 소식 들었죠 그때의 그 사람과
그토록 원망했던 그대 선택… 잘했어요
나 역시 좋아요 그대 덕분에 나를 알았죠
너무나 쉽게 무너져 버리는 나를 알게 해 주었고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까 날 잊긴 힘들 거야
그대의 잘못된 선택이길 비는 비겁한 날 알았죠
떠올리지 마요 그대 옛사랑은 너무나 못난 사람이죠
추억이라 하면서 가끔이라도 내 생각은 정말 안 돼요
이제 만들어가요 그대들의 추억을
내 탓에 늦게 만났지만 나도 잘 살 거예요
또 아파하기엔 내 가슴에게 너무 미안해… 건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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